brunch

매거진 독서머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원댄싱머신 Jul 30. 2019

로자와 모모의 뜨거운 사랑

 _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많은 사람들이 인생책으로 꼽은 책이다. 인생책이라니. 그 정도라면 한 번 읽어봐야지 마음은 먹었지만, 외국 문학에 약하기 때문에 자꾸 미뤄졌다. 읽어야지 하는 리스트만 이미 100권은 되었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리면 다음달, 다음해로 미뤄진다. 그렇게 미루다미루다 드디어 읽게 되었다.



역시나 문학 초보라 그런지, 별 다른 감흥이 없었다. 일단 앞부분에서는, 아이가 말을 하네? 중반을 지나자, 고생이 많구나, 좋은 사람들도 많구나... 후반부에 가까워 오자, 이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책을 한 번만 읽었던 때가 있었다. 그냥 읽고 넘어가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던 때였다. 그러다 두 번 세 번 읽고 나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까지 하고 나니,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깊은 이해의 맛을 본 것이다. 이후론 한 번만 읽어서 느끼는 밍밍한 맛에는 만족을 하지 못 한다. 두 번째 세 번째 읽을 때 느낌이 완전 다르기 때문이다. 이책도 그랬다.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하자, 처음부터 좋았다. 모모가 기쁘면 나도 기쁘고, 모모가 화나면 나도 화났다. 등장인물 한명 한명에 감정이입이 됐다.


사랑


어른이고 뭐고, 서양의학이고 나발이고, 지식, 종교, 민족까지 다 박살낸다. 사랑만 남는다. 그리고 그 사랑은 아이에게 있고, 이민자에게 있고, 성판매여성에게 있고, 아프리카 흑인에게 있다. 그들의 사랑을 그린 이야기다.


주인공은 '모모'라는 아이다. 그는 로자가 기르고 있는데, 로자는 성판매여성이 몰래 낳은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다. 성판매여성은 아이를 기를 수 없다는 프랑스 제도 때문에, 몰래 기른다. 등장인물들은 눈이 안보이는 노인, 신체는 남성이지만 성정체성은 여성인 성판매남성, 마약을 하는 아이, 의사, 포주, 아프리카에서 온 청소부 등이다. 사회의 비주류이자 체류 자체가 불법인 사람들이 주로 나온다.



이 책의 제목은 「자기 앞의 생」이다. 여기서 생은 인생, 삶으로 바꿔도 된다. 왜 번역자가 '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다.


생은 잔인하다.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특히 로자의 정신과 신체를 파괴한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희망


반면 생에서 희망을 발견하기도 한다. 모모는 관심을 받고 싶어서 도둑질을 한다. 물론 나중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도둑질을 하지만, 오로지 따귀를 한 대 맞기 위해서 음식을 훔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달걀을 집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주인 여자가 나왔고,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더 잘 끌 수 있도록 그녀가 내 뺨을 한 대 올려붙여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 곁에 쭈그리고 앉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고 이런 말까지 했다.
"너 참 귀엽게 생겻구나!"
처음에 나는 그녀가 나를 잘 구슬러서 달걀을 도로 찾으려고 그러는 줄 알고 호주머니 깊숙이 든 달걀을 더 꼭 쥐었다. 그녀는 벌로 나를 한 대 갈겨주기만 하면 되었다. 실제로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그렇게들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일어서서 진열대로 가더니 달걀을 하나 더 집어서 내게 주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뽀뽀를 해주었다. 한순간 나는 희망 비슷한 것을 맛보았다. 그때의 기분을 묘사하는 건 불가능하니 굳이 설명하진 않겠다. 나는 그날 오전 내내 그 가게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며 서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따금 그 맘씨 좋은 주인 여자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는 손에 달걀을 쥔 채 거기에 서 있었다. 그때 내 나이 여섯 살쯤이었고, 나는 내 생이 모두 거기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겨우 달걀 하나뿐이었는데...


이 책은 이 잔인한 생이 로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모모는 생에서 어떻게 달걀을 훔쳐내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로자는 나이가 들어서 아프다. 하지만 병원에 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려워 한다.


나는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며 어느 집 대문 아래 앉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세상의 어느 것보다도 늙었으므로 걸음걸이가 너무 느렸다. 사람이 아프면, 눈이 커지면서 표정이 풍부해진다. 로자 아줌마의 눈은 점점 커져서 이제는, 이유도 모른 채 매를 맞으면서 자기를 때리는 사람을 바라보는 개의 눈 같아졌다.


의사는 입원을 권한다. 하지만 로자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 그것이다. 병원으로 끌려가서 죽지 못하고 수명만 연장되는 미래에 공포를 느낀다.


내가 세번째로 카츠 선생님을 보러 갔을 때, 그는 미국에 식물인간 상태로 십칠 년째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 사람은 약으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데, 세계 신기록이라고 했다. 모든 세계 신기록은 다 미국에서 나온다. 카츠 선생님은 이제 우리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병원에서 간호를 잘 받으면 몇 년은 더 살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의사는 모모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하지만, 모모의 사랑이 바로 로자가 원하는 것이다.


로자는 약속해달라고 하고, 모모는 약속한다. 그게 그들 사랑의 방식이다.


"모모야, 그들은 나를 억지로 살려놓으려 할 거다. ... 내 엉덩이를 삼십오 년 동안 손님들에게 내주었는데, 이제 와서 또 의사들에게 내주고 싶지는 않아. 약속해주겠지?"
"약속해요."
"카이렘?"
"카이렘."
카이렘, 유태어로 '당신에게 맹세한다'란 뜻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약속이라도 했을 것이다. 아무리 늙었다 해도 행복이란 여전히 필요한 것이니까.


「자기 앞의 생」이라고 해서, 생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책은 아니다. 자잘한 재미들이 녹아있다. 아래 글에서 이어진다.


★★★★★ 다 박살내고 사랑만 남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배우자는 곰인형과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