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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Aug 14. 2019

니체의 독일인 비판

 _니체 「안티크리스트」

이쁜 책에 또 당했다. 초록초록한 책등, 아담한 크기, 귀여운 부엉이 일러스트까지. 귀엽기 그지없는 책이었는데, 내용은 처참했다.



주의!! 이 책은 종교가 없는 제가 보기에도 너무 잔인해요. 대형교회 세습목사들에 대한 합리적 비판? 아니에요. 그냥 욕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 책을 사서 불태우세요!! (이 글도 굳이 읽을 필요없습니다.)


니체. 팬도 많지만, 마냥 좋아하기에는 너무 폭력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만방자한 것은 유머 코드로 넘어갈 수 있는데, 연민과 공감 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함으로 분류하는 것들은 전부 다 나약함, 노예의 특징으로 몰아붙인다.


내가 니체를 반민주주의자라고 보는 책을 쓰자 니체를 전공한 어느 철학 교수가 반론을 썼지만, 굳이 답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그런 찬양 게임에 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니체 전공 철학자들에게 그런 비판은 쇠귀에 경 읽기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런 전공자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일반인들은 나 같은 사람을 철저히 무시한다. 그러니 지금 생각하면 그런 책을 힘들게 쓸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물론 그래도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니체에게 불필요하게 현혹되어 반민주주의자가 되지 않는 계기가 된다면 다행이다. 아니 니체에게 반민주주의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나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위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책은 몇 권 나오지도 않았는데, 민주주의를 욕한 니체의 책은 그 수백 배를 능가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사실 칸트나 헤겔도 비판해야 한다. 아도르노는 왜 그들을 비판하지 않았을까?
 _박홍규 「인문학의 거짓말」


항상 그렇듯이, 이 책도 오만방자하게 시작한다.


이 책은 극소수의 사람을 위한 것이다. 아마 그들 중 아무도 아직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이 정녕 나의 <차라투스투라>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오늘날 이미 남들에게 이해되고 있는 사람들과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어찌 혼동할 수 있겠는가? ㅡ실로 나는 미래에 가서야 비로소 문제시 될 것이며, 따라서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내가 죽은 후에야 태어날 것이다.


소름 끼치게 맞다. 지금은 사실상 니체의 시대가 되었다.


니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을 기독교가 억누르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 책은, '인간의 본능은 이렇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걸 억누른다. 그러니까 기독교 나쁘다. 진짜는 이거다' 라는 이야기를 사실상 욕하듯이 토해낸다.


삶의 본능이 우리를 행동하도록 자극할 때 하는 행동이 올바른 행동이라는 것은 바로 쾌감이 증명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신조의 내장을 지닌 저 허무주의자는 쾌감을 오히려 항의로 이해했다... 내적인 필연성도 깊은 개인적 선택도 없이, 아무런 즐거움도 없이 일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보다 더 급속히 인간을 파괴시키는 것이 있을까? '의무'의 자동기계보다? 그것이야말로 데카당스에, 심지어 백치에 이르게 하는 처방인 것이다... 칸트는 백치가 되고 말았다. ㅡ그러한 그가 괴테와 동시대인이었다니!


의무와 윤리를 강조한, 칸트를 바보로 만든다. 다른 책들에서 수많은 철학자들을 바보로 만들어 왔던 장면이 떠오른다.


예전 같으면 신은 한 민족을 대표하고, 한 민족의 강력한 힘, 한 민족의 영혼에서 나오는 공격적인 모든 것과 힘에의 갈망을 표현했었다. 지금의 신은 한낱 선한 신에 불과하다... 결국 신들에 대해서는 다른 대안이 없다. 신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의 하나다, 즉 힘에의 의지이든가 ㅡ이러한 경우에 그들은 여전히 한 민족의 신들이다.ㅡ 아니면 힘에 직면하여 무기력하다. ㅡ이러한 경우에 그 신들은 필연적으로 선량해질 것이다...


선한 신이 무기력한 신이 된다.


그런 것들이 지닌 자연성을 부정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가치를 창조 해내고, 가치를 부여하는 권력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사제는 자연을 평가 절하하고 탈신성화한다. 이러한 대가를 치러야만 사제는 존재한다. ㅡ신에 대한, 다시 말해 사제에 대한, '율법'에 대한 불복종은 이제 '죄'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다시금 '너 자신을 신과 화해하는' 수단들은 뻔한 일이지만, 사제들에 대한 복종을 더욱 철저하게 보장해 준다. 오직 사제만이 '구원해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고찰하면, 사제들이 조직되어 있는 사회는 어디서든 '죄'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죄가 권력의 실질적인 집행자이고, 사제는 죄에 의존해서 살며 '죄를 범하는' 일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들의 지상 명제는 "신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한다"는 것이다. ㅡ쉽게 말하면 사제에게 복종하는 자를 용서한다는 것이다.ㅡ


기독교가 사제를 위한 종교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그는 예수를 새롭게 해석한다. 멋있게 묘사한다.


이제 나는 되돌아가서 기독교의 진정한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ㅡ심지어 '기독교'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오해다.ㅡ, 근본적으로는 오직 한 사람의 기독교도만이 존재했었고,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그리고 '복음' 역시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바로 그 순간 이후로 '복음'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살았던 삶의 특성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쁜 소식', 즉 화음이었다.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기독교의 기독은 예수를 가리킨다. 중국어로 지두, 일본어로 키리스토, 영어로 지저스다. 그 한자를 우리식으로 발음하면 기독이 된다.


이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는 그가 산 방식대로, 가르친 방식대로 죽었다. ㅡ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가 인류에게 남긴 것은 바로 실천이었다. 재판관과 추적자, 고발자, 그리고 온갖 종류의 중상과 조소 앞에서 보여준 그의 태도 ㅡ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보여준 그의 태도, 그는 저항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지 않는다. 최악을 피하려고 대응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런 사태를 도발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과 더불어, 그들 안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괴로워하고, 사랑한다...


육두문자가 없는지 번역하는 과정에서 정리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실상 욕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 일의 결과는 무엇인가? <신약성경>을 읽는 경우에는 손장갑을 끼는 편이 좋다. 그렇게나 불결한 것을 가까이 하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욕을 한참 하고 나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기도 한다.


스스로 기만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다 회의주의자들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회의주의자다. 정신적인 힘, 뛰어난 정신의 힘에 의해 얻어지는 강인함, 즉 자유라는 것은 회의를 통해서 증명된다. 신념을 지닌 사람들은 가치와 무가치에 대한 모든 근본적인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신념은 감옥이다. 이 사람들은 멀리 보지 못하고, 자신의 발밑도 보지 못한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교회를 살린 독일인 루터를 비판하면서 독일인에 대한 비난도 이어진다. 이건 약간 귀엽다.


고백하지만 그들, 이러한 독일인들이 나의 적이다. 나는 그들이 갖고 있는 온갖 종류의 개념 및 가치의 불결함을 경멸하며, 모든 성실한 긍정과 부정을 대했을 때 그들이 보인 온갖 종류의 비겁함을 경멸한다. 그들은 거의 천년 동안, 그들이 손댄 모든 것을 헝클어뜨리고 혼란을 야기하였다. 그들에게 양심은 절반밖에 ㅡ아니 8분의 3밖에 없다! 그 때문에 유럽이 병들어 있는 것이다. ㅡ그들은 또한 그 양심에 가장 불결한 기독교, 가장 치료하기 어렵고 가장 반박하기 어려운 프로테스탄트주의를 지니고 있다... 만약에 우리가 기독교를 없애지 못한다면, 독일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을 것이다...


비교적 약한 부분만 소개한 것이다. 그래도 많이 불편하다.


★★★★★ 욕하는 걸 이렇게 오랫동안 볼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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