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장석주 「행복은 누추하고 불행은 찬란하다」
재생지를 좋아한다. 가볍기도 하고 그 거친 느낌이 좋다. 아주 새하얗지 않아서 눈이 편안하다. 재생지로 만든 책이 많지 않아서 아쉽다. 인쇄를 할 때 재생지를 골라서 하면 좋을 텐데, 실제로 충무로에서 재생지로 인쇄하는 업체를 찾지 못했다. 인터넷에는 있는 것 같다.
재생지로 책을 만들면 느낌도 좋고, 환경도 살리고 좋을 것 같은데, 찾기는 쉽지 않다. 만은 사람들이 찾지 않기 때문에 생산을 하지 않게 되고, 생산을 하지 않으니 단가가 올라간다. 참고로 갱지, 혹은 신문용지라고 부르는 더 얇고 가벼운 종이는 일반 A4 용지보다 저렴하다.
오랜만에 재생지로 만들어진 책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서 내용을 훑어봤다. 일단 재생지로 되어있으니 사기는 사야하는데, 기왕이면 내용도 좋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가끔 사놓고 읽지 않는 책이 있기도 하다. (대략 십중팔구 정도?) 하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아직 못 읽은 것과 읽기 싫은 것은 다르다. 그래서 기왕이면 못 읽는 것을 선택하고 싶어서 두근두근 하며 봤다. 시를 소개하고 감상평을 적은 책이었다. 이정도면 되겠지, 하고 샀다.
그런데 막상 읽어봤더니, 시 전체를 소개하는 책은 아니었다. 좋았던 시에서 한 구절 정도를 소개하고, 그에 대한 감상을 풀어놓았다. 저자는 시에서 감동을 받아서 이런 말 저런 말을 하지만, 막상 독자인 나는 그 시를 읽어보지 않았으니 도대체 어떤 문맥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답답했다. 결국 그 시를 검색해서 찾아보는 수밖에.
시를 검색해서 찾아보게 만드는 게 저자의 목적이라면, 성공이다. 요즘에는 검색해보면 시 본문이 다 나온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을 O2O라고 하는데, 매장에서 실제 물건을 보고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사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시에 관해서도 O2O를 구현해버렸다. 답답해서 검색하게 되니까.
저자가 소개한 시 구절 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한다. 궁금하면 검색해보시길. 나만 당할 순 없지ㅋ
아무렇게나 굽이쳐도 상관없는
등뼈를 따라 걸어간다.
_신해욱 「나의 길이」
하나뿐인 안마용 침상에는 가을비가
아픈 소리로 누워 있다
_심재휘 「중국인 맹인 안마사」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_유희경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빗방울 하나가
차 앞유리에 와서 몸을 내려놓고
속도를 마감한다
_김주대 「가차 없이 아름답다」
네 잘못이 아니다
홀로 떠 있다고 울지 마라
_홍영철 「외딴섬」
나는 내 짐승의 일부
이 그림자를 밟고 서서 무엇도 되지 않으리
_유희경 「빛나는 시간」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에 살지 않겠다
초저녁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켜지 않겠다
_김경미 「오늘의 결심」
작은 분홍색 알약을 먹는 가을 아침에
분홍색은 아프다
_박정남 「분홍색은 아프다」
덧셈은 끝났다
밤과 잠을 줄이고
뺄셈을 시작해야 한다
_김광규 「뺄셈」
★★★★★ 좋은 시를 추천해주는 건 좋은데, 너무 답답해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