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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Sep 25. 2019

가능성을 상상한다

책 구매가 취미기 때문에, 집에 책이 많다. 그리고 책장도 아주 크다. 내가 사는 곳은 벽이 전부 책장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저택 서재가 떠오르지만 그냥 원룸이다.)


처음에는 충분해 보였으나 얼마 못 갔다. 지금은 책을 이중으로 쌓고 있다. 앞에도 책이 있으니 뒤쪽에 있는 책은 끝부분만 간신히 보인다. 무슨 책인지 구별도 쉽지 않다. 물론 읽지도 않았다.


이 사태를 두고 G는 도저히 보지 못하겠는지 나를 설득했다. 논리적으로 매우 깔끔한 형태였다.


A 나는 책을 사는 것을 좋아한다.
A-1 책을 읽는 것보다 주는 것보다 무엇보다 사는 것을 좋아한다.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B 책을 버리면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B-1 어차피 읽지 않은 책이고, 앞으로도 읽지 않을 책인데 그렇게 가슴 아파할 것도 없다.
B-2 책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알라딘에 되파는 것이기 때문에 마일리지가 쌓이고 이를 이용해서 책을 더 살 수 있다.


벌써부터 가슴이 아프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C 공간이 생기면 다시 책을 살 수 있다.
C-1 책을 사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에, 책을 버리면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다.
C-2 책을 사고 팔고 사기를 되풀이하면, 행복도 무한대에 수렴한다.


혼란스럽지만,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논리에 따르면, 나는 책을 버림으로써 더 많은 책을 살 수 있고, 이는 더 큰 행복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하나둘 책을 알라딘으로 가져가지 시작했다.


자칫하면 모든 책을 다 버리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는 논리를 개발하는 중이다. 일본의 현자, 우치다 타츠루가 필요하다.


그에 따르면, 나는 대책 없이 책을 사고 감당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가능성에 대해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이다.


저자는 지인의 집 정리를 도우러 갔다. 지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엉망진창인 집 상태를 보고 처음에는 지진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원래부터 지저분했다고 한다.


썩은 것, 도저히 쓸 수 없는 것들을 반나절에 걸쳐 골라낸 후 버렸습니다만, 그 사람은 제가 버린 것들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그 중 몇 개는 "아직 쓸 수 있어요"라며 집 안으로 되가져가더군요.
그때 이 사람이 '물건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적 사용 가능성'에 대해 대단히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물건도 어딘가에 쓸모가 있을지 몰라' 생각하면서 어떤 쓰레기에서도 유용성의 '맹아'를 찾아내는 겁니다. 그러니 그녀의 눈에 '그냥 쓰레기'이거나 '백 퍼센트 쓸모없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거지요.
 _우치다 타츠루 「곤란한 결혼」
예를 들어 교사는 이런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 매우 적합한 직업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평가하는 아이도 '이 애한테는 사람들이 모르는 풍부한 자질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좋은 교사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만 그래도 과감하고 빠르게 판단하는 사람보다 인내심 있는 교사가 될 가능성이 더 많다고 봅니다.
 _우치다 타츠루 「곤란한 결혼」


실제로 그 쓰레기 투성이 집의 교수는 은퇴한 교수였다고 한다. 어쩌면 제자들이 준 선물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아 정말 배운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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