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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Oct 09. 2019

내 생애 최고의 강의

 _김종엽 「안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

대학생 때 읽은 책이다. 당시 나는 지식에 굶주린 상태여서, 수업을 하나 듣는다고 하면, 일단 교수가 쓴 책과 논문을 읽었다. 그 열정으로 때로는 학사경고를 받기도, 때로는 과탑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얻은 파편적인 지식을 덕지덕지 붙여서 그럴듯해 보이는 신념을 만들어 왔다.



이 수업에서는 열정이 조금 과했다. 매 강의를 다 녹음했고, 수업이 끝나면 녹음파일을 다시 들으면서 텍스트로 옮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하다.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 파일이 어디 있더라...


책은 생각보다 재미없었다, 강의에 비해서. 강의 「철학적 인간학」은 내가 봤던 그 어떤 예능보다 재미있고, 내가 들었던 그 어떤 수업보다 얻는 게 많았다. 매일 하나의 주제를 정해서 학생이 간단히 발표하면, 이어서 교수의 강의가 이어졌다. 강의도 역시 토론식이었다. 학생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던지면, 잡아서 다시 논제로 돌려놓는 탁월한 능력이, 교수에게 있었다.


모 여배우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틀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날 주제는 정체성이었는데, 어떻게 이 주제와 딱 맞는 영화에 출연했을까 놀랄 정도였다. 당시 교수는 이 여배우가 학생임을 잊고 팬심으로 악수를 하려고 해서, 보는 내가 다 민망했다. 강의실을 뛰쳐나가려다 간신히 참았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정체성, 자유, 사랑, 용서, 죽음 등 의미 있는 주제를 한 주에 하나씩 다루었다. 나는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 발표했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교수와 몇몇 학생들은 간단히 한 잔 하기로 했다. 교정을 같이 내려갔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난다. "답안을 읽어봤는데요, 내용이 아주 좋았어요." 이렇게 이야기하고 몇 걸음을 더 내려가다 다시 뒤돌아섰다. 검지 손가락을 들고, 내용을 떠올리듯이 천천히 말했다. "아, 정말 좋았어요." 학교는 언덕에 있었다. 계속 내려가 학교 동문이 한다는 술집에 갔다.


(내 생각에) 기말고사의 답안은 교수를 감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진짜. 정말.) 기말고사의 주제는 없었다. 자유롭게 쓰는 거였다. 나는 첫 강의부터 마지막 강의의 주제를 전부 요약해서 설명했다. 단순한 요약은 아니다. 사회경제적 이슈를 꺼내고, 수업의 흐름에 맞게 정리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그냥 이슈(아마 아동 노동에 대한 거였다.)에 대한 분석 글로 보았을 것이다. 해당 수업을 들은 사람만, 우리 수업에서 나온 바 있는 모든 주제, 정체성, 사랑, 용서 이런 것들이 녹아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김종엽 교수의 수업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놀기만 하다가 가장 좋아했던 교수의 수업을 하나만 들었다.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다. 어떻게 이분은 그렇게 재미있게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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