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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Oct 22. 2019

건강책인줄

 _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마케팅하기 좋은 책이다. 가벼운 에세이나 힐링 서적 같다. 실제로는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의 강연이나 논문 등을 제자가 정리해서 만든 책이다. 그렇다고 내용이 완전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목차를 보자.


01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02 인간의 본질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03 자유는 진짜 인격의 실현이다

04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

05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 판다

06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07 진짜와 허울의 차이를 보다



정말로 무력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무력감은 자본주의와 생산시스템 하에서 느끼는 무력감일 뿐이다. 완전 사기는 아니고 알베르 카뮈 식 사기다. 「결혼, 여름」은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정말로 결혼을 생각하고 읽으면 낭패감을 느끼게 된다. 저자가 말하는 결혼은 세계, 자연과의 결혼이다.



착취


19세기적인 느낌의 착취는 끝났다. 식민지를 착취하고 채찍으로 노예를 다스리는 방식은 이제 (공식적으로는) 없다. 있다면 정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산업사회의 착취는 형태가 달라졌다.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이 존재한다.
 _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철학 분야 베스트셀러인 「피로사회」를 읽어본 사람은 익숙한 개념일 수 있다.


한국 사회 역시 성과사회이고 그에 따른 사회적 폐해와 정신 질환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적어도 그 점에서는 서구 사회와 전혀 다르지 않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_한병철 「피로사회」


소통


소통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특이한 점은 마냥 부정적인 점만 이야기하지 않고 긍정적 측면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소통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강조하였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작품 속 한 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정말로 '사랑'을 '사랑받을 것이라는 기대'라고 생각한다면 "지옥은 다름 아닌 타인들이다."
 _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게다가 타인의 가장 깊은 내면에 숨은 본질은 그의 침묵 탓에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침묵에는 부정적 면과 긍정적 면이 있다. 그 뒤로 몸을 숨기는 데 일조한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이지만, 타인이 자기 자아의 복사품이어서는 안 될뿐더러 실제로 내가 알고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우리가 방해하지 말아야 할 사적 공간이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_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우리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은 타인의 공간을 여백으로 남겨둔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 부분도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타자의 부정성은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비사회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성을 제거하고 이를 소비 가능한, 헤테로토피아적 차이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어려운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해할 수 없는 타자성을 아토포스라고 표현했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여백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병철이 하고 있다.


감정


저자는 이성만 강조되고 감정이 제거되는 현실에 반기를 든다. 교육을 통해서 감정과 충동, 본성이 제거된다고 말한다.


또 한편으로 교육은 아주 일찍부터 아이들에게 결코 '자기의 것'이 아닌 감정을 느끼도록 가르친다. 특히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무비판적으로 친절하며 미소를 지으라고 가르친다. 그래도 미처 교육이 다 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나중에 사회적 압력이 해결해 준다. 웃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 눈에 '상냥한 사람'이 아니다. 웨이트리스, 세일즈맨, 의사가 되어 서비스를 팔려면 상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육체노동 말고는 팔 것이 없는 사회 피라미드 맨 밑바닥 사람들과 제일 꼭대기 사람들만이 특별히 '상냥할' 필요가 없다.
 _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실천


에리히 프롬은 이론만 늘어놓고 끝내지 않는다. 마지막에 실천 방법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제자가 엮었지만, 그동안 직접 쓴 책과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실천 방법이 나오도록 했다.


통찰


일단 알아야 한다.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자신 및 사회의 운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결정적인 힘과 상황을 올바르게 통찰하는 것이다.
 _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올바른 사회 이론, 개인에게 적용할 올바른 심리학 이론을 갖추지 못한 것은 무력감의 주요 원인이다. 이론은 행동의 조건이다.
 _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감탄


우리는 구체적인 사람에게서 추상을 본다. 그가 자신과 우리에게서 추상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이상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_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타인을 제대로 봐야 한다. 그러려면 감탄해야 한다.


아이들은 이 능력을 아직 갖고 있다. 노력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세상에서 방향을 찾고 항상 새로운 사물을 붙잡아 알아간다. 당황하고 놀라고 감탄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창조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
 _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아이처럼 동물처럼 감탄해야 한다.


개에게는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완전히 행복의 순간이었다. 순진하고 어리석게도 세상에 다시금 있게 된 것을 놀라운 것으로 여겼고 솔직하게 기뻐했다.
 _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재미있게 읽기는 했다. 에리히 프롬 책은 원래 적당히 어렵지, 많이 어렵지는 않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다만 한 가지 주제를 깊이 파는 건 아니라, 다른 책들을 먼저 보고 나중에 읽는 게 낫다.


★★★★★ 책이 작고 이쁘다. 짧은 강연을 보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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