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귀엽고 짧은 단편이다.
첫 작품이자 가장 재미있었던 「깊이에의 강요」는 한 화가의 이야기다. 젊고 재능 있는 작가는 평론가에게 '마음에 와닿는 그림이지만 깊이는 조금 부족한게 아닌가' 하는 평가를 받는다. 악의적인 평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화가는 반박할 수가 없었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는 정신을 못차리며 돌아다니는데 심지어 썸남에게도 무리수를 둔다.
그녀를 마음에 들어한 어떤 젊은이가 잠자리를 같이 하기 위해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 자신도 그가 마음에 들었으니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깊이가 없으니 각오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들은 남자는 단념했다.
밑도 끝도 없이 이상한 단편은 「장인 뮈사르의 유언」이다. 세계의 진실을 알게된 한 인물이 죽기 전 사력을 다해 쓴 유언장이다. 어떻게 진실을 알게 되었는지 그 진실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적는다. 진실의 괴로움에 몸부림 치는 그는 오히려 가는 길이 편안해 보인다.
나는 말한다. 세계는 무자비하게 닫히는 조개이다.
누구나 조개의 위력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세계가 조개화되고,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공포에 질려 각기 다른 자신들의 신을 향해 절규하면서 도움과 구원을 간청하는 날, 거대한 조개는 유일한 대답으로서 날개를 펼쳐 세계를 덮친 다음 그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 것이다.
드디어 죽음의 끝에 이르게 되니 마음이 가벼워진다. 불쌍한 친구여, 그대는 아직 그 한가운데 있다네.
마지막 작품 「문학적 건망증」은 감명을 준 책, 인생을 바꾼 책에 대한 이야기다. 예전에 읽어본 책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아쉽게도 인생을 바꾸기는 커녕 책 내용을 기억하는 것도 쉽지 않다. 저자는 분통을 터뜨린다.
내 손은 거의 자동적으로 연필을 향한다.
<이것에 밑줄을 그어야겠다.>
나는 생각한다.
「한쪽 귀퉁이에 <아주 훌륭하다>라고 적고 느낌표를 힘주어 찍자. 그리고 ... 」
그런데 이런! <아주 훌륭하다>라고 긁적거리기 위해 연필을 들이대자. 내가 쓰려는 말이 이미 거기에 적혀 있다. 그리고 기록해 두려고 생각한 요점 역시 앞서 글을 읽은 사람이 벌써 써놓았다. 그것은 내게 아주 친숙한 필체, 바로 내 자신의 필체였다. 앞서 책을 읽을 사람은 다름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 전에 그 책을 읽었던 것이다.
그 순간 이후 형용할 수 없는 비탄이 나를 사로잡는다. 문학의 건망증, 문학적으로 기억력이 완전히 감퇴하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 책도 내용도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