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원댄싱머신 Mar 12. 2020

지하철

출근길 지하철과 한산한 지하철의 풍경은 꽤나 다르다.


서른둘이 되어서야 첫 출근을 했, 나는 한산한 지하철만 보고 자란 셈이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수업을 들으러 가거나 번화가에 놀러 갈 때나 탔다.


지하철에서 4

세 여인이 졸고 있다
한 여인의 머리가 한 여인의 어깨에
한 여인의 어깨가 한 여인의 가슴에
한 여인의 피곤이 또 한 여인의 시름에 기대
도레미 나란히

세 남자가 오고 있다
순대 속 같은 지하철
데친 듯 풀죽은 눈알들 헤집고
삶은 듯 늘어진 살덩이 타넘고

먼저, 거지가 손을 내민다
다음, 장님이 노래 부른다
그 뒤를 예언자의 숱 많은 머리
휴거를 준비하라 사람들아!
외치며 깨우며 돌아다니지만

세 여인이 졸고 있다
세 남자가 오고 있다

오전 11시 지하철은
실업자로 만원이다

 _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그래서 그런지 지하철에 대한 인상은 최영미처럼 노곤하다. 책 보기 좋은 공간이었던 지하철은 졸기에도 적합했다. 옆사람의 어깨에 기대 졸기도 하고 (죄송) 책을 읽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메모를 하기도 하던, 한적한 공간이었다.


지금 운전을 하고 있어서, 지옥철로 불리는 지하철 러시아워를 겪는 일은 많지 않다. 가끔 강남역에서 미팅을 마치고 퇴근할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강남역 부근의 중고서점 알라딘에 간다. 한 번 가면 갑자기 도매상이 된 것처럼 책을 사들이기 때문에, 양손에 책을 가득 든 보따리장수가 되어 강남역으로 내려간다. 그때 역 플랫폼은 지하철 안이나 마찬가지다. 분명 줄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


수학 시간에 점, 선, 면을 배운 기억이 난다. 한 사람이 점이라면, 지하철 플랫폼에는 보통 사람들이 일렬로 선을 이룬다. 그런데 강남역 퇴근길에는 선이 없다. 면을 이룬다.


이때의 지하철을 실감나게 묘사한 글이 있다.


처음 열차가 들어오던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열차라기보다는, 공포스러울 정도의 거대한 동물이 파아, 하아, 플랫폼에 기어와 마치 구토물을 쏟아내듯 옆구리를 찢고 사람들을 토해냈다. 아아,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뭔가 댐 같은 것이 무너지는 광경이었고, 눈과 귀와 코를 통해 머리 속 가득 구토물이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야! 코치 형이 고함을 질러주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도 놈의 먹이가 되었을테지. 정신이 들고 보니, 놈의 옆구리가 흥건히 고여 있던 구토물을 다시금 빨아들이고 있었다.
 _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본질이 보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