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다니자키 준이치로 「인어의 탄식」
모든 걸 상속받은 행운아가 있다. 재물을 물론이고 어마어마한 행운과 동시에 미모와 재능까지 물려받았다. 즐길 만큼 즐기고 누릴 만큼 누리며 살고 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오로지 새로움 뿐이다. 다 떨어진 새로움에 목말라 하며 지루함의 사막을 걷다 오아시스를 만났다. 인어를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재력가답게 우연한 만남 같은 로맨스는 없다. 그냥 사버린다.
그 여자는 아름다운 청보석으로 만든 물 항아리 안에 유폐되어 비늘이 돋은 하반부를 뱀처럼 구불구불 유리 벽에 찰싹 붙인 채, 바야흐로 인간이 사는 밝은 곳에서 갑작스럽게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듯이 목덜미를 젖가슴 위로 숙이고 팔을 등 뒤 허리춤에 낀 채 몹시 괴로운 듯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_다니자키 준이치로 「인어의 탄식」
여기부터 의외의 상황이다. 놓아달라는 인어의 부탁을 들어준다. 소유와 소비만을 추구하던 그가 인어를 풀어준 것이다. 소유의 끝을 본 자는 소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정반대의 상황도 있다. 옷과 행낭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법정스님은 소유에서 벗어난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다른 의미이다.
_법정 「무소유」
나는 소유와 욕망의 세계를 표류하고 있다. 서쪽 끝에는 재벌의 마음이 기다리고 있고, 동쪽 끝에는 스님의 마음이 기다리고 있다. 어느 쪽의 삶이 더 실현가능할까. 원하는 바를 성취하고 나서 벗어날 가능성.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워질 가능성. 신대륙을 찾는 콜럼버스의 마음으로 파도에 몸을 맡긴다. 이쪽이 서쪽인가? 동쪽인가?
부자 되겠다고 허우적거리다가 다 날리고 나서야 비자발적으로 스님 될 가능성도 상당하겠다.
★★★★★ 재미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