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엄지용 「나란한 얼굴」
보통 시집을 읽을 때, 마음에 드는 시가 있으면 포스트잇을 붙인다. 좋아하는 시집의 경우는 포스트잇이 열개 이상 붙이기도 한다. 반면 포스트잇이 하나도 안 붙는 시집도 있다. 그러면 억지로라도 비교적 마음에 드는 시를 찾아내서 한두 개라도 붙인다. 포스트잇 붙이려고 책을 읽는 셈이다. 원래 다들 초장 먹으려고 회 먹지 않나?
「나란한 얼굴」을 추천받아서 책을 펼쳤다. 큰 기대는 하지는 않았다. 표지가 이상했으니까. 시집으로 유명한 출판사도 아니었고.
그리고 처음부터 한장 한장 넘겨가며 찬찬히 읽었다. 포스트잇을 붙이고 나서 세보니, 10개의 시를 읽으며 포스트잇을 10개 붙였다. 다 좋았다. 계속 읽었다. 시집을 덮고 보니, 포스트잇이 거의 모든 페이지에 달려있었다. 시가 이렇게 좋은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다니. 다들 박준이나 하상욱은 알아도 엄지용은 모른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냈다면, 창비에서 냈다면 이렇게 무명일 수 있을까. 비록 작은 출판사에서 낸 시집이지만, 언젠가 빛을 볼 날이 온다고 본다. 출판사도, 시인도.
서점 BOOK극성에도 비치되어 있다. 주인장이 기분 좋으면 판다.
억울한억굴
억울한얼굴
얼굴한억울
정말 하나하나 다 주옥같지만, 그중에 딱 2개만 공개한다.
흠
걷던 아스팔트 깨진 틈에 꽃향기가 난다
그 틈으로 아스팔트는 숨을 쉬었다
깨진 틈은 아스팔트의 흠이었다
나에게도 흠이 있다
너에게도 있을 것이다
나의 흠과 너의 흠이 만나는 곳에도
그 틈에도 아마 싹이 트고 꽃이 필 것이다
흠은 흠이 아니고
그저 틈일 그곳에서
우리는 숨을 쉴 것이고
우리에게서도 꽃향기가 날 것이다
_엄지용 「나란한 얼굴」
가장자리
아빠는 하필 등 한가운데가 아파서 전화를 했다. 가장자리가 아프면 혼자 파스를 붙이겠는데 하필 한가운데가 아파서 전화를 했다. 혼자서는 파스를 붙일 수가 없어서 가장자리만 어루만지다가 내게 전화를 했다.
아빠는 항상 가장자리에 섰었다. 가운데는 내 자리였고, 아빠의 자리는 항상 가장자리. 가장의 자리를 가장자리라고 부르는 건 아닐까 생각했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아빠네라 부르고, 결혼 전에는 그냥 우리 집이었던 그 집에 갔다. 아빠는 등을 어루만지며 누웠고, 나는 아빠의 아픈 등 한가운데를 어루만지다 파스를 붙였다.
내 자리는 가운데였고, 아빠가 아픈 곳은 가운데였다. 파스를 그 위에 붙인다. 아빠의 손이 닿지 않는 가운데.
파스를 붙이곤 괜히 그 옆에 가장자리를 어루만진다. 아빠의 손이 닿던 유일한 곳. 아빠가 자꾸 만져서 괜히 더 닳고 닳은 것 같은 자리. 아빠의 자리. 이름부터 무거워 말하다 자꾸 놓아버릴 것만 같은 자리. 가장자리.
_엄지용 「나란한 얼굴」
★★★★★ 별 다섯 개만 줄 수 있다는 게 아쉬운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