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이민경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이론서가 아닙니다. 대화를 하다가 말이 막힐 때 바로 쓸 수 있는 실전용 매뉴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시중에 널린 '긴급 영어회화 100선' 같은 거라고 봐도 되겠네요. 이 책에서는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을 주제로 이루어지는 대화만 다룹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해를 시키려 노력한다'는 말, 묘하게 모순입니다. 이해란, 원래 시키는 게 아니라 하는 겁니다.
상대에게도 내가 겪은 차별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를 말할 자유는 있겠지만, 그 경중을 따지고 정당성을 판단하는 것은 아무리 민주주의라 한들 토론으로 결정할 게 아닙니다.
견고하던 남성의 세계에도 이제야 균열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균열의 원인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상대는 '문제 없던 남녀 사이'가 갑자기 틀어져 당황스럽고 섭섭할 테지만, 한쪽에서는 내내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그것이 비로소 그들의 귀에 닿은 겁니다.
당신은 우선 당신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않은 상태와는 대화를 정확히 거절할 자유를 확보해야 합니다. 자연히 확보되지 않으니 연습을 해야 합니다.
여성은 모두 아름답다거나, 여성은 평화로운 존재라는 말, 여성이 현명하므로 이해심을 갖고 남성을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말도 다 똑같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여성의 틀이 정해져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그러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억압받는 쪽이 억압하는 쪽의 마음에 드는 방식을 취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원하는 한, 과격해지면 안 된다는 압박에는 굴하지 않아도 됩니다. 백인이 흑인들이 느끼는 부당함을 이해한 뒤, 사이좋게 토론을 통해 불평등을 바로잡았더라면 좋았을 겁니다. 일본인이 3.1운동의 취지를 잘 이해하고 격려해주었다면 좋았겠지요.
당연하게 나에게 쏟아졌던 질문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 생각보다 많은 게 달라집니다. 나를 검증하던 질문을 상대에게로 돌리면 상대가 얼마나 부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바로 보입니다.
당신이 질문하고 평가하는 위치를 점하면 대화가 훨씬 수월해질 뿐 아니라, 상대가 당신 앞에서 차별적인 언행을 조심하게 되는 효과도 있습니다. '네 앞에서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다'는 불평이 들린다면 좋은 신호입니다. 원래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되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