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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Aug 12. 2020

말싸움 실전 매뉴얼

 _이민경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너무 재미없어서 한번 접었던 책이다. 나름 독립출판계에서 히트한 작품이라 샀는데, 앞부분이 온통 화딱지여서 보다 슬며시 덮었다. 이번에는 지하철의 힘을 빌었다. 아무리 재미없는 책도 지하철에서 서서 읽으면 그냥저냥 읽어진다.


다시 읽으니 나름 재미있었다. 가슴을 치며 표현하는 저자의 답답함도 이제 귀여웠다. 저자의 표현대로 이건 이론서라기 보다는 실전서다. 호신술 교본 같은 책이다. 여성으로서 페미니즘 관련 이슈와 관련해서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분들을 위한 참고서다.


이론서가 아닙니다. 대화를 하다가 말이 막힐 때 바로 쓸 수 있는 실전용 매뉴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시중에 널린 '긴급 영어회화 100선' 같은 거라고 봐도 되겠네요. 이 책에서는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을 주제로 이루어지는 대화만 다룹니다.


책은 매우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부터 한다. 저자가 살면서 얼마나 많이 여성 이슈와 관련해 토론해보고 동의하지 않는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 고생을 했는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자신과 같은 고난을 겪고 있는 동지들에게 그럴 필요없다고 위로해주면서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을 계속 하겠다면, 어떻게 대화할 수 있고, 어떻게 거절할 수 있고, 어떻게 싸울 수 있는지 설명한다. 싸울 수 있는 문장은 예시까지 들어 설명하기 때문에 혼잣말로 연습하면 말싸움의 달인이 될 수도 있다.



다 읽고 나니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호전적이고 감정적인데, 위로가 된다. 원래 화날 때 나 대신 누가 화를 내주면 위로가 된다고 하던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이 경우다. 페미니즘 이슈에 사람들이 갈등하고 반목하는 모습을 두고, 갓을 쓴 선비들은 점잖게 말하라고 충고한다.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고 힘을 내자고, 되도 않는 위로 시도를 한다. 위로에서는 위로가 나오지 않는다. 예의범절에서도 위로는 나오지 않는다. 내가 힐링 책을 읽지 않는 이유다. 그런데 분노로 똘똘 뭉쳐있는 책에서 위로를 받다니. 재미있다.



인정


열심히 여성의 차별을 설명하려해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설득하려 노력해도 이해시키기 쉽지 않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해를 시키려 노력한다'는 말, 묘하게 모순입니다. 이해란, 원래 시키는 게 아니라 하는 겁니다.


상대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상대에게도 내가 겪은 차별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를 말할 자유는 있겠지만, 그 경중을 따지고 정당성을 판단하는 것은 아무리 민주주의라 한들 토론으로 결정할 게 아닙니다.


싸움


이제 싸우지 말자, 평화롭게 지내자, 말을 하기는 쉽지만 결국은 원래대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다. 수혜자는 수혜를 계속 받고, 피해자는 피해를 계속 견디라는 말이다. 그래서 착해보이는 주장이지만, 가장 나쁘다.


견고하던 남성의 세계에도 이제야 균열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균열의 원인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상대는 '문제 없던 남녀 사이'가 갑자기 틀어져 당황스럽고 섭섭할 테지만, 한쪽에서는 내내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그것이 비로소 그들의 귀에 닿은 겁니다.


거절


독서모임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기꺼이 논의할 의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이다. 그래서 누군가 이상한 질문을 던져도, 다들 나름의 의무감과 친절함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의도와 달리 결국 분위기 초토화의 결말로 마무리한 적이 많았다. 저자는 가능하면 거부하라고 말한다.


당신은 우선 당신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않은 상태와는 대화를 정확히 거절할 자유를 확보해야 합니다. 자연히 확보되지 않으니 연습을 해야 합니다.


여성혐오


여성을 비하해도 여성혐오지만, 여성을 미화해도 여성혐오다. 여성의 고정적인 상을 상정하는 것 자체에 문제제기를 하는 게 페미니즘이다.


여성은 모두 아름답다거나, 여성은 평화로운 존재라는 말, 여성이 현명하므로 이해심을 갖고 남성을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말도 다 똑같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여성의 틀이 정해져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과격한 노선


페미니즘이 과거와 달리 너무 과격해졌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다. 하지만 그만큼 효과적으로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다는 이야기의 방증이다.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아가던 기득권층이 불편해야, 평등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어차피 그러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억압받는 쪽이 억압하는 쪽의 마음에 드는 방식을 취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원하는 한, 과격해지면 안 된다는 압박에는 굴하지 않아도 됩니다. 백인이 흑인들이 느끼는 부당함을 이해한 뒤, 사이좋게 토론을 통해 불평등을 바로잡았더라면 좋았을 겁니다. 일본인이 3.1운동의 취지를 잘 이해하고 격려해주었다면 좋았겠지요.


질문


가능하면 대화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한다면, 이렇게 하라! 고 저자는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한다. 그중에 하나는 질문이다.


당연하게 나에게 쏟아졌던 질문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 생각보다 많은 게 달라집니다. 나를 검증하던 질문을 상대에게로 돌리면 상대가 얼마나 부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바로 보입니다.


평가


평가를 받는 게 아니라, 평가를 해야 한다고 저자는 권유한다. 이론을 공부하고 근거를 찾는 것보다 그렇게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게 필요하다.


당신이 질문하고 평가하는 위치를 점하면 대화가 훨씬 수월해질 뿐 아니라, 상대가 당신 앞에서 차별적인 언행을 조심하게 되는 효과도 있습니다. '네 앞에서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다'는 불평이 들린다면 좋은 신호입니다. 원래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되는 거니까요.


뒷부분에는 (상대방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구체적인 문장와르르 나온다. 슬쩍 보기만 해도 마음이 상한다. 정말 호신술이다.



★★★★★ 무시무시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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