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에 초고라는 아담하고 조용한 공간이 있다. 층고가 높고 어두운 편인데, 작은 램프가 곳곳에 있어서, 불빛에 비춰 책을 읽기 좋다. 사람들 마음이 다 비슷한지,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나처럼 책을 읽고 있다. 책 읽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이곳, 초고의 특징이다.
생맥주를 시켰다. 책을 읽다가 이상한 문장을 발견했다. 듣도보도 못했던 내용이다.
운이 좋은 사람
운에 대한 부분이었다. 불확실성이 높아진 사회에서는 운이 좋은 사람이 최고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도 이유를 딱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자연스럽게 운이 좋은 사람을 따르게 된다고 한다.
전쟁터를 예로 드니, 이해가 확 된다. 누구라도, 이상하게 운이 좋고 항상 살아남은 장교를 따르게 될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부대는 실제로 강한 전투력을 보인다. 장교를 믿고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21세기 일본에서 비슷한 양상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운좋은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따라가야 할지, 누구 예측이 맞을지, 누구의 통찰력이 믿을 만한지, 이런 것들이 젊은 사람들에겐 사활의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지금 필사적으로 안테나를 뻗치고 '지금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 불운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찾아야 할지, 그를 따라갈 만한지 여부가 판단 기준입니다. 비평가의 눈으로 멀리서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걸고 선택하는 것이니까요. 그런 사람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기분 좋게 잘 살고 있으니까요. _우치다 타츠루 「어른 없는 사회」
맥주에 취해서 아무 생각 없이 읽고 있다가, 마지막 문장을 보고 술이 깼다.
이건 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늘 운이 좋았다. 중학교 때까지는 게임만 했다. 밤새도록 와레즈 사이트에서 게임을 다운받았다. 모뎀이 하루 종일 돌아가서 집전화가 먹통이 되었다. 아무도 공부하라고 보채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고등학생이 되고 나니 이제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공부도 적당히 성취감 느낄 정도로만 했다. 타고난 머리 때문인지 성적은 쑥쑥 올랐다. 학원 친구들과 같이 공부하다 보니 힘든지도 몰랐다. 수다 떨듯이 공부했다. 대학교도 이른바 명문대에 들어갔다. 전공을 뭘 고를까 고민하다, 그냥 있어 보이는 걸로 골랐다. 마침 복수전공이 허용되는 학교였는데, 그렇게 경제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재미로 학교를 다녔다. 흥미있는 수업만 들었다. 내 몸보다 조금 더 컸던 고시원 공간은 잠만 자는 곳이었고, 쾌적한 도서관에 살았다. 도서관에서 어슬렁거리며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리는 것. 그게 나에겐 취미생활이자 일상이었다. 사업한다고 깝치다가 말아먹었다. 아.. 이건 좀 뼈 아픈 실패지만... 암튼 내 돈으로 망한 건 아니니 그건 운이 좋았다. (아빠 미안...) 열심히 놀다가 뒤늦게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서른둘이 되기 며칠 전에 간신히 취직을 했는데, 입사동기가 나보다 9살이 어렸다. 다들 신기해하며 맞이했다. 회사는 으리으리한 대기업은 아니지만 사원을 인간적으로 대우해준다는 느낌을 받는 곳이었다. 월급도 인간적으로 준다. 직무도 마음에 든다. 열심히 일하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쉬는 시간도 많아서 하루에 책을 몇 시간이고 읽을 수 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직업이 얼마나 될까. 낮이든 밤이든, 여자친구가 전화할 때마다 나는 카페에 있다. 급기야 여자친구는 나를 이름 대신 놈팽이라 부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생각해보니, 회사동료들은 나를 월급루팡이라 불렀다.
생맥주를 한 잔을 다 마시고, 다시 하나를 더 주문할 동안 생각해봐도, 내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이유를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