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김리연 「간호사라서 다행이야」
데이 근무와 이브닝 근무에는 환자 12명을, 나이트 근무에는 18명을 돌봤다. 두경부암 수술 환자가 많아서 기관 내 삽관 관리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가 제일 힘들었다. 라운딩은 30분에 한 번씩 도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더 자주 드나들어야 했다. 한 환자를 간호하다 보면 옆 환자의 튜브에서 그렁그렁 소리가 났고, 그 환자의 분비물을 제거하고 나면 또 옆 환자에게서 그렁그렁 소리가 나는 식이다. 그럴 때엔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다.
그래도 어린 환자들과 교감하는 나만의 비법이 있다. 간호복을 보면 아이는 일단 긴장한다. 먼저 최대한 친근하게 말을 많이 건다. 그리고 아이가 좋아할 만한 스티커를 주면서 내 가슴에 달려 있는 간호사 명찰에 붙여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아이는 예쁜 스티커를 골라서 붙여야 된다는 생각에 집중해 잠시 자기가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때 정맥주사를 시작한다.
그렇게 한 달여를 지낸 후에야 내가 피를 잘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를 보면 나도 모르게 긴장해 어지러워졌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까맣게 잊고 있던 간호학생 시절 일이 떠올랐다. 제주도의 한 종합병원 투석실로 첫 실습을 갔었다. 응급한 일이 벌어지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환자의 상태를 예의 주시해야 해 어느 정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투석기에서는 윙윙 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혈액이 돌았다. 첫날 실습을 하는데 너무 어지러웠다. 다음 날도 투석실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다시 어지럼증이 왔다.
나는 항상 뉴욕에서 살기를 꿈꿨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뉴욕병'에 걸려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 <뉴욕, 뉴욕>을 인생의 BGM처럼 깔고 살았다. 그리고 결국 내 오랜 병은 뉴욕이 치료해주었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뉴욕 생활이 시작됐다. 매일 아침 나는 출근하는 남편과 같이 집을 나선 후 혼자 카페에 앉아 병원에 이력서를 냈다. 남편이 퇴근하면 함께 저녁을 먹고 거리를 오래오래 걸어다녔다. 데이비드와 손을 잡고 밤공기를 마시며 걷노라면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곤 했다. 그럴 때는 같이 하늘을 쳐다보고 와하하 웃으며 "우리가 드디어 뉴욕에 산다!!" 하고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