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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May 25. 2019

우리도 일본처럼 행복해지고 있다

 _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책은 아래와 같은 충격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것은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해인 2010년이 저물어 갈 무렵의 일이다. 「뉴욕타임즈」의 도쿄지국장인 마틴 파클러 (Martin Fackler, 44세) 씨가 이런 질문을 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처럼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왜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 겁니까?"
그 당시 마틴 파클러 씨는 일본의 세대 격차에 관한 기사를 쓰고 있었는데, 일본 젊은이들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현재 일본 젊은 층의 대다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불안정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학 졸업자의 취직율은 저조하고, 구직을 핑계로 노는 학생도 드물지 않다. 고령화가 차차 진행되고 있는 일본에서 현역 세대에게 부가되는 부담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어째서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처럼 불우한 상황에 놓여 있는데도, 현실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을 조금도 보이지 않고 있는가? 바로 이 점이 마틴 파클러 씨의 의문이었다. 나(26세)의 대답은 간단했다.
"왜냐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_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책의 제목만큼 모순적인 바람이 서늘하게 부는 것 같다.


실제로 오늘날 일본 젊은이들의 생활 만족도나 행복지수는, 이미 각종 여론조사에서 밝혀졌듯이 최근 40년 동안 가장 높았다. 예를 들어 내각부의 「국민 생활에 관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2010년 시점에서 20대의 70.5%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한다고 대답했다. 그렇다. '격차사회'라거나 '세대 간 격차'에 대해 여러 가지 지적이 나오고 있지만, 일본의 젊은이들 중 약 70% 정도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만족도는 다른 세대보다 높게 나타났다. 30대의 경우, 생활 만족도에서 '만족'한다는 수치가 65.2%, 40대의 경우에는 58.3%, 50대의 경우에는 55.3%까지 떨어진다. 젊은이들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중장년 세대의 생활 만족도가 훨씬 낮게 나타난 것이다.
또한 요즘 젊은이들의 생활 만족도는 과거의 20대와 비교해 봐도 높게 나타난다. 한창 경제 고도성장기였던 1960년대 후반의 20대의 생활 만족도는 60% 정도였고, 1970년대에는 50%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그러던 생활 만족도가 1990년대 후반부터 70%를 오르내리는 수치를 보이고 있다.
 _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왜 불황 속의 젊은이들은 행복하다고 할까. 심지어 젊은이를 걱정하는 세대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전 교토 대학교 교수인 오사와 마사치는 조사에 회답한 사람들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인간은 어느 순간에 "지금 불행하다.", "지금 생활에 불만족을 느낀다."라고 대답하는 것일까? 오사와 마사치에 따르면, 그것은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라고 한다.
미래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 사람이나 장래의 인생에 '희망'이 있는 사람은 "지금 불행하다."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제 자신이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 혹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_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만족도가 높은 이유가 사실은, 희망의 부재에 있었다.


이런 오사와 마사치의 가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20대의 '생활 만족도'가 상승하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불황'이라고 하는 '어두운 시대'일 때가 많다.
 _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지금 일본의 젊은이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구조적인 이유는 불황이었다. 구조적인 분석에 이어 심리적 해석을 덧붙인다.


마치 한 마을에 사는 주민들처럼 '동료'가 모인 '작은 세계'에서 일상을 보내는 젊은이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행복한 이유의 본질이다.
사회학에는 '상대적 박탈'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이 소속돼 있는 집단을 기준으로 행복을 가늠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예컨대 편의점에서 '시급 900엔'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이, 같은 직장의 다른 사람이 자신과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시급 980엔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은 한 해에 수십억 엔이나 버는 부자를 동경하면서도, 막상 그런 부자들과 자신을 진지하게 비교해 보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편의점에서 일하는 그에게 있어 재벌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에서, 경기가 불황일수록 생활 만족도는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 나라 전체가 불경기일 때는 모두가 어려운 처지이기 때문에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경기가 좋아지면, 행세깨나 하는 사람이 자기 주변에 등장할 테고 미래에 대한 기대도 높아지기 때문에, 자신의 수입이 다소나마 올랐다고 해도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_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사람들은 작은 세계에 살고 있고, 그 세계 사람들과 비교해가며 자신의 만족도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불황일 때는 다같이 힘드니까, 상대적 박탈감은 덜 느낀다는게 이해가 된다. 일리가 있는 설명이다. 결국 저자는 지금의 행복와 만족도가 불황의 방증이라는 점을 발견하고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중국에서 농민공의 생활 만족도가 높고 개미족의 생활 만족도는 낮다는 점을 통해, 나는 다소 안타까운 결론 하나를 도출하게 되었다. 만약 일본이 격차가 고정된 계급 사회, 또는 신분제 사회로 바뀐다면 '혹시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결론 말이다.
 _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충분히 이해가 되는 걱정이다. 적어도, 설문조사를 통해서 측정되는 '생활 만족도'는 격차가 고정된 계급사회나 불황인 사회에서 올라간다.


이 책은 저자의 주장이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나마 내셔널리즘에 대한 부분만 저자의 의견이 비교적 강하게 표명되었다. 사회학이라는 단어에 걸맞게, 시대상을 보여주는 여러 텍스트들을 훑으면서 지금 시대의 모습을 기록했다. 아마 시간이 지나고 이 책을 통해서 사람들은 21세기 젊은이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분석이지만, 안타까운 결론이다. 이 책의 결론은 내 고민의 시작이다. 나는 여기서 어떤 결론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 사회학은 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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