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원댄싱머신 Mar 08. 2021

책을 읽다 큭큭

책을 읽다 큭큭거렸다.


아, 이거 오줌보가 홍금보네



이 문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재개그 같은 말장난을 툭툭 던지는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이 문장 역시 툭툭 던져졌다.


내가 큭큭 거린 이유가 내가 아재라서는 아니다. 물론 나는 아재다. 아재긴 하지만 아재개그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물론 엄청 싫어하는 건 아니고, 아재개그는 문학을 멀리하는 사람도 본능 속에 잠재된 문학적 본능을 나름 부끄럽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한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재개그를 그리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니라는 거다. 이렇게 하나마나한 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건, 그만큼 깊은 곳에 숨어있던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였다. 당시 나는 교무실에서 살았다. 이불 펴놓고 잤다는 건 아니고, 거의 매일 같이 학교 마치면 학원 교무실로 와서 학원 문 닫을 때까지 있었다. 저녁도 여기서 먹고 공부도 여기서 하고 선생도 여기 있었으니 그때그때 궁금한 건 질문하기도 했다.


당시 학원은 분위기가 좋았다. 선생과 학생 사이가 좋아서 서로 농담도 많이 주고 받고 친하게 지내곤 했다. 가장 재미있고 인기있던 선생은 영어였다. 영어는 어느날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유레카를 외치듯 말했다.


야! 너 홍금보 닮았어!


홍콩 영화의 인기가 사그라들던 시기였다. 총을 들고 성냥개비를 입에 문 주윤발, 장국영 등 누아르의 주인공 옆에서 통통하고 푸근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홍금보.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얼굴을 돌렸다가 다시 얼굴을 돌렸다.



홍콩영화 이야기를 듣자마자, 독자는 눈치를 챘을 것이다. 나는 아재고, 교무실 이야기는 벌써 수십 년도 지난 이야기라는 것을. 지금과 달리 메갈리아도 페미니스트도 없었고, 사람들은 외모 비하를 교무실 들락거리듯이 수시로 했다. 그게 나쁜 거라 인식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얼굴을 돌려서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해서 낙엽이 떨어지면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리는, 청춘호르몬이 퐁퐁 솟아서 양볼에 여드름이 퐁퐁 솟아나던 귀여운 아이는, 여드름만 빼면 홍금보였다.


얼굴을 다시 돌린 이유는 웃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웃음 소리는 물론이고 떨리는 어깨까지 조절하기 위해 노력했다. 수의근과 불수의근이 위아래로 춤추는 와중에도, 나는 문제집을 푸는 척 팬을 움직였다. 나도 여드름이 퐁퐁 솟아나던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때였고, 그 아이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여학생에게 홍금보라니!!


홍금보는 민망해하며 발끈했고, 영어는 여전히 킥킥 대며 홍금보를 반복해서 언급했다. 나는 폭발을 막는 활화산처럼 온몸을 비틀었고 내 양 어깨는 무음으로 설정한 듯 진동만 울렸다. 고등학생의 인내심으로 나는 버텼고, 모든 인내심을 써버려서인지, 그해 나는 수능을 망쳤다.


참고 누르면 기어코 폭발하는 게 민주주의뿐일까. 웃음도 그렇다. 너무 크게 웃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나는 지금 지하철에서 마음껏 큭큭 거리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 참았던 큭큭이다. 지금 내가 크게 웃는다고 상처 받을 아이는 이제 없지만, 직장인의 인내심으로 데시벨은 조절하고 있다. 지하철에서 껄껄 대는 아재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여드름은 없지만 체면호르몬이 퐁퐁 솟아서 사람들 앞에서는 아재개그를 던지지도 못하고, 껄껄 거리지도 못한다.


오늘 글은 유난히 길고 장황하다. 내가 아재라서 그런 건 아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껄껄 대지도 못하고 체면 차리면서 일기장에 장황하게 아재개그를 늘어놓으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지금 큭큭 대면서 읽고 있는 책이 장황하기로 유명한 최민석의 책이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쉽게 영향을 받는 편이다. 김훈을 읽은 날은 문장이 짧아지고 말이 짧아진다. 야너말이짧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최민석을 읽은 날은 문장이 장황해지고 무리수를 던진다. 최민석에 대해 구구절절 소개하지는 않겠다. 한 문단만 소개하면 바로 알 것이다.


희태 형은 그 이름으로 말하자면, 기쁠 희(喜) 자에 클 태(太) 자를 쓰는 사람으로 나의 고등학교 1년 선배이자, 그 이름에 걸맞게 자신은 물론 주변과 세상에 큰 기쁨을 주고자, 에로 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떨치다 에로 영화 산업이 위축되자 아예 성인 사이트를 열어 버린 사람이다. 과연 큰 기쁨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만날 때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땅에 업보를 지고 태어나며, 그 업보는 대개 이름을 통해 해석할 수 있다는 지론을 펼쳤다. 그에 따르면, 이름이란 부모가 지었건 역술가가 지었건, 작명되는 그 찰나 신의 영감이 작명자에게 임하기 마련인데, 그 이유는 신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될 좌절과 방황, 상처와 회복의 과정을 해쳐 나갈 비결을 바로 그 이름 속에 숨겨두었기 때문이라 했다. 따라서 이름이야말로 신과 개인이 진실로 소통할 수 있는 창구이자 비밀의 문이며, 인간이란 존재는 결국 자신의 이름을 통해 운명을 해석할 수밖에 없으며, 인간이 이름 속에 담긴 운명을 거역할 경우 신의 저주를 받음은 물론이거니와, 동시에 그것은 자기 출생의 근거를 오만하게 부정하는 것이며, 나아가 수천억 개의 톱니바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리어 돌아가는 우주의 질서를 깨뜨리는 극악무도한 짓이며, 한술 더 떠 자연의 작동 원리와 인류의 평화를 깨뜨리는 범우주적 죄악이라고 설파했다.
 _최민석 「능력자」


인물 하나 설명하는 게 이렇게 길다. ㄱㄱ하기 마련인데 ㄴㄴ하고 ㄷㄷ할 수밖에 없으며 ㄹㄹ은 물론이거니와 동시에 ㅁㅁ하는 것이며 나아가 ㅂㅂ하고 한술 더 떠 ㅅㅅ하다고 마무리한다. 정말 한술 더 뜨는 문단이다.


지하철에서 큭큭 거리며, 그동안 그 아이의 닮은꼴로만 기억했던 홍금보를 오랜만에 검색해봤다. 알고보니 한국인 아내와 결혼을 했었다. 했었다, 라는 건 과거형이지만, 아픈 과거는 건드리지 않고 넘어가기로 한다. 한국인 아내와 낳은 4명의 아이는 전부 중국에서 연예인으로 활동한다. 젊은 시절 성룡을 너무 괴롭혀서 사이가 틀어졌다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화해를 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작가1 : 최민석


매거진의 이전글 건방진 매력, 선은 넘지 말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