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와서 여자친구와 동네 산책을 했다. 좋게 말하면 정겹고 솔직히 말하면 낙후된 동네다. 두리번 거리면서 작은 가게들을 탐색했다. 얼마 안 가 반가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반.찬.가.게. 마침 집밥에 맛을 들인 터라,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런데 분위기가 반찬가게라고 하기엔 어색했다. 아주머니 한분이 계셨는데, 약간은 식당같고 또 약간은 가정집 같은 곳이었다. 평상도 있고 테이블도 있고 의자는 있는데 반찬은 없었다. 반찬 없나 물었더니 냉장고에서 오이소박이와 장조림을 주섬주섬 꺼낸다. 이게 다인가 물으니 김치도 판단다. 도저히 반찬가게로 보이지 않는 곳이었으나, 그래도 반찬은 필요했으니, 오이소박이와 장조림을 조금씩 샀다. 카드 결제기는 있었으나 결제하는 방법을 모르셔서, 내가 카드 꼽고 금액 입력해서 직접 결제했다.
찝찝한 기분으로 반찬을 받아서 나왔다. 과연 맛이 있을까. 아니, 그보다 여기는 반찬가게가 맞는 것일까. 의구심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며 여자친구는 말했다. 저런 곳인데도 아직도 안 망했잖아. 분명 맛이 있겠지? 동네 사람들이 와서 김치 주문하는 곳 같아. 우리 엄마도 김치 주문하는 곳이 있거든. 거기 엄청 맛있어.
듣고보니 일리는 있었다. 과연 맛이 있을지 없을지만 생각하며 걸었더니 어느새 도착했다. 의심반 기대반으로 저녁을 차렸다. 먹어보니 역시, 여자친구의 예상은 적중했다. 찌게도 끓이고 소세지도 볶았는데, 손은 자꾸 오이소박이를 향했다. 김치찌게에는 와인보다는 막걸리(아니면 고량주)인데, 향긋한 오이향을 참지 못참고 와인을 땄다. 오이소박이에 와인 한병 비웠다. 여기 오이소박이가 와인 도둑이다. 앞으로는 김치도 여기에서 주문해야겠다.
맛집의 기준. 이렇게 생겼는데 망하지 않았다? 하는 곳이라면 맛집일 수 있다. 확실한 건 아니다.
나는 구식이다. 나는 반드시 주치의와 치과의사와 단골 미용사가 있어야 하고, 믿을 만한 서점도 하나는 꼭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_로널드 라이스 「나의 아름다운 책방」
로널드 라이스처럼 주치의는 필요없지만, 믿음직한 반찬가게는 하나 필요하다. 밥은 쿠쿠가 믿음직하다. 문제 해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