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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May 17. 2021

고마워, 말고 다른 말을 할 수 있을까

지인이 이별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며,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우리가 함께 한 추억이 얼마인데, 이렇게 갑자기 기별도 없이 통보하느냐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그는 똑똑한 편이고, 책도 많이 읽고, 권투를 해서 건강하다. 남자가 봐도 멋진 친구다. 유일한 단점은 재미없다는 것뿐. 지루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제외하고는 괜찮은 남자친구감으로 보인다. (이 친구와 사귀어 보지 않아서 지루하다는 게 얼마나 취약한 지점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런 그가 사랑을 시작했다는 사실에, 나는 먼저 축하했고, 인내심 많은 그의 여자친구에게 감사했다. 항상 응원하던 커플이었는데, 이번에 헤어진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나는 하나마나한 조언을 해주어야 하고, 친구는 사나마나한 삶을 한동안 살아가야 한다.


이미 보름 전에 통보를 받았다고 울먹거리는 친구에게, 나는 그동안 혼자 끙끙대느라 고생 많았다고 위로했다. 이어서 세끼 꼬박꼬박 잘 챙겨먹으라고, 산책도 하고 운동도 더 많이 하라고,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했다. 흘러간 이별에 그것 말고 필요한 게 더 있을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잘 견디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며 몸을 만들어야 한다. 연애도 권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아직 헤어지기 전이었다면, 나는 다른 말을 해주었을 것이다.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긴장한 선수의 어깨를 부여잡고 흔들며 소리치는 코치처럼,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연애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래서 링 밖에서 보면 너무 당연한 것도, 정신없이 펀치를 맞고 피하는 상황에서는 생각하지 못한다. 지금 내 상황은 잊고 링 밖에서, 매력적인 이성을 떠올려보자. (동성애자라면 동성을 떠올려보자.) 내가 지금 유부남인지, 백수인지, 현실은 다 잊고 그냥 상상해보자. 떠오르는 사람이 딱히 없다면 연예인도 좋다. 만약 그가 나와 1년 동안 만나준다면, 365일 사랑해준다면, 나는 그에게 뭐라 말할까.


고마워,

말고 다른 말을 할 수 있을까.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에는, 나를 만나 주어서 고마워,

함께 하는 동안에는,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사랑이 끝나는 순간에는, 그동안 함께 해주어서 정말


고마워,

말고 다른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를 사랑해준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고마운 일이다. 지금 고개를 끄덕인다면, 실제 이러한 상황이 닥쳤을 때 실행하면 된다. 막상 상황이 닥치면 정신 못 차릴 게 뻔하기 때문에. 미리 생각해두어야 한다. 고마워, 고마워, 항상 되뇌자. 밥을 차려줘도 고마워, 같이 외식해도 고마워, 밥상을 엎어도 고마워. 왜 항상 고맙다고 해? 라는 말을 상대방에게 듣는다면, 지금 연애를 잘 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계속 그렇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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