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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Jul 11. 2021

바람직한 와인

집 앞에 이마트가 있어서 자주 간다. 얼마 전에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다. 신세계에서 직접 수입해온 이마트 와인이 4,900원에 팔리고 있었다. 홀린 듯이 사먹었다. 맛은 의외로 좋았다.


민감한 혀의 소유자가 아니라, 내가 고른 와인에 대체로 만족하는 편이다. 평소에는 1만원대* 와인을 주로 마신다. 맛에 관대한 내 혀도 3만원대 와인에는 반응한다. 확실히 3만원이 넘어가면 더 맛있다. 그런데 이번에 들어온 이마트 와인은 겨우 4,900원에 유통되지만 혀가 반응한다. 이제 1만원대 와인은 안 마신다. 차라리 3만원대로 마시거나, 아니면 이마트 와인으로 간다.


와인의 등급을 아주 단순하게 나누면, 1만원대, 3만원대, 5만원대 이상. 이렇게 된다. 당연히 애호가라면 이렇게 대충 나누지 않을 거지만, 나는 허세로 마시는 거니 대략 이렇다.
1만원대 : 괜찮다. 먹을 만하다.
3만원대 : 매우 맛있다. 고르는 순간부터 행복하다.
5만원대 : 내 돈 내고 먹어본 적 없다.
물론 위 가격은 마트 기준이다. 레스토랑에서 8만원에 파는 것도 마트에서는 3만원대다.


일반적으로 와인은 3천병 단위로 수입을 한다. 많이 수입하는 경우는 그 열배인 3만병을 한꺼번에 가져오기도 한다. 이번에 들여온 4,900원 와인은 100만병을 한꺼번에 수입했다고 한다. 규모의 경제다. 규모의 경제는 양을 늘려서 비용을 낮추는 전략이다. 이마트처럼 한번에 들여오는 와인의 양을 늘리면, 병당 발생하는 유통비용은 낮아진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범위의 경제가 있다. 범위의 경제는, 문어발처럼 영역을 확장해서 비용을 낮추는 전략이다. 와인의 소매유통을 이마트가 맡았다면, 와인을 해외에서 가져오는 건 신세계L&B다. 신세계에서 다 해먹기 때문에 유통비용을 낮출 수 있는 거다. 결국 이 와인의 가성비는 규모의 경제와 범위의 경제가 동시에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아주 바람직하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시장은 다변화될수록 유리하다. 대기업은 품질이 보증된 상품을 대량으로 유통해서 가격을 낮추고, 소기업은 독특한 개성의 매력적인 상품을 내놓는 것이 이상적이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대기업에서 가격을 낮추는 경우는 소기업 제품을 베낄 때뿐이고, 소기업이 차별화된 제품을 내놓는 건, 노동자 영혼을 갈아넣어 착취할 때뿐이다.


온라인 시장은 갈수록 커지고, 대형마트의 성장은 주춤하고 있다. 이마트는 올해 처음으로 적자를 보았다.* 온라인 고객을 매장으로 유인하기 쉽지 않은데, 술은 온라인 판매가 금지되어 있다. 이마트에서 와인에 승부수를 던진 이유도 이것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마트는 2019년 2분기에 첫 적자를 기록했다. 1993년 창사 이래 처음이다. 온라인 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적자를 냈다. 이후 적자와 흑자를 반복하는데, 전반적으로는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마트 트레이더스 등 자회사의 실적은 더욱 좋아지고 있다.


와인이 수입 가격에 비해 너무 비싸고 유통사에서 가져가는 마진이 너무 크다는 비판이 많았다. 2018년 한국소비자원에서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그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평균 수입가격과 판매가격을 계산해보면, 레드와인이 평균 11.4배, 화이트 와인이 평균 9.8배가 차이난다. 다 유통비용때문이다.


그런줄 알았다. 다 유통비용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스페인산 스파클링 와인 보히가스 그랑 리저브 엑스트라 브뤼는 매장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이름이 워낙 길어서 기억하기는 커녕 보고 읽기도 어렵다. 비싼 곳은 90,000원, 싼 곳은 19,000원이다. 와인의 종류가 다양하고 가격 비교가 쉽지 않으니 장난치는 거다. 소비자도 가만 당하지 않는다. 「와쌉」이라는 홈페이지가 있다. 여기에 와인 이름을 치면, 어느 매장에서 얼마에 파는지 다 나와있다.


선호하는 와인이 있다면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도 좋다. 저렴한 곳을 검색하고 사자. 입맛이 관대하다면 고민할 것 없이 이마트 와인을 선택하면 된다. 와인이 4,900원이다.





예전에 적었던 아래 글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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