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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Jul 30. 2021

견지해야 할 태도

_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굉장히 그럴듯한 표지의 책이다. 분명 코로나에 대한 책으로 보이는데, 내용은 중구난방이다. 각종 현안에 대한 글을 모은 듯하다. 일단 유명해지면 마구잡이로 글을 써도 책을 낼 수 있다. 일단 나부터 슬라보예 지젝이 낸 책이라고 사지 않았나. 철학자의 책은 특히 그렇다. 알랭 바디우의 책을 몇 권 샀는데, 버릴까 말까 지금도 고민 중이다. 흐름은 두서 없고, 제목은 그럴듯하다.



중구난방인 책이지만,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분명하다. 중요하지 않은 부분 다 걷어내고 핵심만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1. 위기다.

2. 위기의 원인은 2가지.

3. 하나는 지구파괴.

4.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5. 바꿔야 한다.

6. 해결방법도 2가지.

7. 하나는 생태주의.

8.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


200페이지나 되는 책이지만, 쓸만한 부분만 모으면 20페이지면 충분하다. 형편없는 책에 비해, 저자의 주장 자체는 의미가 있다. 한국은 비교적 잘 대처하고 있는 편이지만, 외국, 특히 선진국은 상황이 심각하다. 의료체계가 붕괴되고, 빈 공간은 불신과 혐오로 채워진다. 그런 곳에서 더 필요한 책이다. 좌파 우파를 가리지 않고 코로나를 부정하거나 음모론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언급할 게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철학자다. 구체적인 제도나 물질을 말하지는 않고 방향과 가치를 나름의 논리로 풀어내는 사람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걸 기대할 필요는 없다. 그건 병리학자가 하고 있다.


다른 책은 논리적으로 쓴 걸 보면, 원래 슬라보예 지젝이 산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이 책이 특별히 잡탕인 거다. 문제는 책 표지다. 김진영이라는 디자이너가 필요 이상으로 그럴듯하게 만들었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을 피해자로 만들었다. 베스트셀러에 오를 책은 아니다. 그냥 에세이다. 재미있는 에세이가 보고 싶다면 최민석을 읽고, 철학적인 에세이를 읽고 싶다면 알베르 카뮈를 읽자. 훨씬 낫다.


책은 대체로 코로나에 대한 인식과 대처방안에 대해 이야기한다. 차근차근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인식


코로나는 바이러스다. 대응하려면 국가적인 통제가 필수적이다. 그래서 통제에 민감한 자유주의자가 문제제기할 수 있다. 극우주의자는 적을 상정한다. 중국의 연구소에서 퍼뜨렸다는 음모론을 설파한다. 해석은 자유지만, 그 해석이 바이러스를 어쩌지는 못한다. 눈을 감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바이러스는 계획과 전략을 갖추고 우리를 무찌르려는 적이 아니라, 어리석게 자가증식하는 한갓 메커니즘일 뿐이다.


무시해도 소용이 없고, 과잉해석도 틀렸다. 바이러스는 자연의 메커니즘이다. 그냥 증식할 뿐이다. 우리는 현실적인 대처방안을 찾아야 한다.


원인


그가 주목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환경 파괴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지구를 파괴하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다. 이익에 기대어 작동하는 시스템은 마스크, 진단키트, 산소호흡기 등을 제대로 분배하지 못하고 있다.


자연이 바이러스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메시지를 돌려주는 일이란 사실이다. 그 메시지는 이렇다. 네가 나에게 했던 짓을 내가 지금 너에게 하고 있다.


대응방안


원인을 지목했으니, 이에 맞는 대응방안도 제시한다. 하나는 생태주의다. 바이러스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심지어 작물까지 공격한다. 그래서 모든 생명을 고려한 전지구적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다. 저자가 말하는 공산주의는 이상사회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니다. 재난에 대처하는 조치다. 그래서 이를 재난 공산주의라 부른다. 다른 민족과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 대신 전지구적 연대로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충분한 자원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야 할 일은 그것들을 시장의 논리와 상관없이 직접 배분하는 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책이다.


태도


코로나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크고 작은 문제를 만나게 될 거다. 그리고 그때마다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 거다. 우리가 슬라보예 지젝에게 무언가를 배운다면 그건 문제를 대하는 태도다. 판단은 과학적으로 하되, 결단은 정치적으로 한다. 이게 코로나에 대처하는 태도이자, 앞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취해야 할 자세다.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는 상황을 판단하는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방해한다. 부동산 투기는 나쁘다고 생각한 사람은 대부분은 부동산 가격이 오르지 않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시장은 신념과 전혀 다르게 움직인다. 심지어 폭등한다. 문재인 정권 하에서 선한 의도로 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래서 가난해졌다. 벼락거지라는 멸칭은 안타깝지만 사실에 부합한다. 부동산 시장의 추이를 따질 때,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잠시 접어야 한다.


판단할 때는 고이 숨겨놓고 있다가, 결단할 때가 되면 이데올로기를 꺼내야 한다. 상황은 파악이 끝났다. 그러면 나 혼자 잘 사는 방향으로 갈 거냐. 아니면 손해 보면서 연대하는 방향으로 갈 거냐. 방향을 선택하는 거다. 뒤쳐진 사람 손을 질질 끌고 가는 건 분명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이건 이데올로기다. 때가 되면 정치적 선택을 해야한다.


우리가 어떤 길을 갈지, 이 선택은 과학이나 의학과 상관없는, 철저하게 정치적인 선택이다.


이상한 책 하나를 읽어서, 독후감 쓰느라 고생했다. 그래도 욕 하면서 적다보면, 생각이 정리되는 긍정적인 부작용도 있다. 때로는 잘못된 스승도 우리를 성장시킨다.


★★★★ 그럴듯한 표지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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