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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Jun 29. 2022

복수로 하는 위로

 _임발 「도망친곳에서 만난 소설」

솔직히 고백한다. #임발 작가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인줄 몰랐다. 북페어에서 우연히 몇번 봤다. 책은 안 읽었다. 그냥 그정도. 그런데도 무슨 용기가 났는지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초대했다. 코로나로 인해 사적인 모임은 인원 제한이 있어서 딱 2명만 초대했는데 그중 한명인 거다. 꽤나 부담스러운 초대였을 거다. 그런데 작가님도 무슨 용기가 났는지 북페어에서 한두번 보고 책도 안 읽은 사람의 무례한 초대에 응했다. 사실 좀 무례했다. 대단한 사람인줄 몰랐기 때문에 말도 약간 무시하는 투였던 것 같다. 집에서 신나게 놀고 헤어졌으나 여전히 책은 안 읽었다. 나중에 읽어야지 하고 마음만 먹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새로운 책을 만들었고 인쇄했고 새로운 가족이 생겼고, 일하는 부서가 바뀌어서 일을 새로 배우고,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하게 되는 일련의 정신없는 과정을 거쳤다. 여전히 책은 안 읽었다.


소설은 익숙치 않은 장르라 진입장벽이 조금 있다. 사는 건 쉬워서 진작에 사놓고 책장에 모셔놨다. 제목은 #도망친곳에서만난소설 . 단편소설집이다. 각 작품마다 나름의 테마가 있는데 첫번째 소설은 '자만'이다. 장벽을 가까스로 넘어 첫번째 소설을 읽었다. 잡지사 기자가 성공한 사업가를 인터뷰하는 내용이다. 소설가는 첫 작품에서 자전적 서사를 꺼낸다고 하는데, 임발 작가님은 어떤 사건을 겪었을까, 그 사건을 어떻게 변용하고 차용했을까를 상상하며 읽었다. 나는 성공한 사업가가 자만하다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나중에 꽃기린 @purple_and_book 님이 리뷰한 걸 보니 모든 등장인물이 자만한 모습을 어느정도 보이고 있었다. 이걸 내가 한번에 이해할 줄 알았다면 그건 작가의 자만. 다 이해했다고 깝치는 꽃기린님의 자만. 그런데 한번 더 읽어보니 꽃기린님 해석이 맞는 것 같다.


역시 소설은 나와 맞지 않아. 빠른 포기를 맞이했다. 책을 덮었지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였다. 첫번째 작품만 나와 맞지 않았다.


첫번째 작품은 그렇게 지나갔고, 며칠이 지나서 다시 책을 펼쳤다. 두번째 소설부터 빠져들기 시작했다.


조직은 조직을 위해서 언제든지 얼굴색을 바꾼다. 갑자기 표정이 왜 그러냐고 항변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받아들이고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는 게 현명하다. 88p
해야 할 말이나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기괴한 인내만으로도 가져올 수 있는 알짜배기 평판이 꽤 많았다. 89p


두번째 작품 #폭력적인호의 는 '착각'이 주제다. 누군가 주인공을 좋아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전혀 달갑지 않다. 충분히 로맨틱하게 진행될 수도 있는 이야기가 짜증 섞인 말투로 그려진다. 이 작품은 독자의 착각을 유도한다. 다 읽고 나면 깨닫는다. 아 내가 잘못 생각했네? 이번에도 역시 임발 작가를 생각하며 읽었다. 분명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썼을텐데, 둘중 누구일까. 세번째 작품 #진로발달이론의재해석 은 '상심'이 주제다. 주인공이 학생 시절 겪은 아픔, 직장에서 겪는 어려움. 시작이 이래서 주인공의 상심에 대한 이야기구나 했는데 유쾌하게 마무리된다. 상심을 기대한 독자만 상심.


다음 작품들도 통쾌하고 후련하다. 네번째 작품 #물류센터에있던그생수는어디로 는 손을 덜덜 떨며 읽었다. 작가의 필력으로 독자를 사정없이 몰아치니 정신을 못차리고 읽게 된다. 작가가 그리는 서사에 의해 이렇게까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내가 신기하다. 작가의 내면도 나와 비슷한 구조인 걸까? 그래서 그려진 상황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걸까? 나도 물류센터에서 일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다음 작품 #불필요한만남 도 재미있다. 마지막 #녹취의전말 은 충격.. 소설가가 주인공이다 보니 당연히 임발님을 떠올리며 읽었다. 작가는 글을 통해 복수한다. 마음 속으로 바라던 일들을 글로 써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또 반전. 복수의 방향이 바뀐다.


재치 있는 문장이 너무 많았다.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북페어에서 본 작가님은 약간 순박하고, 어리숙해보였는데, 아름답게 짜여진 문장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부작용이 아닌가 싶다.


졸업 무렵, 필요에 의해 급하게 가까워진 컨설턴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관심 없는 자가 아무리 애를 써서 감동을 끌어내고 마음을 얻으려 한들 애정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회사도 똑같다고. 당신 이력서에는 회사가 진짜 원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김대리의 마지막 선물은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수없이 발송했던 나의 이력서와 비슷했다. 110p
나의 첫 직장은 빈틈없이 순수한 노답의 결정체였다. 동기복? 상사복? 그러니까 인복은 전혀 없고, '우리나라도 이제 저녁 있는 삶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하고 의문을 제기해봤자 싸대기 한 대 맞지 않으면 다행이었던 일복만 팡팡 터지는 그런 곳이었다. 135p
착상 단계에 있는 날 것의 생각 덩어리가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고 예술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득했을 때 비로소 책이라는 형태가 된다는 걸 모르는 거 같았다. 226p


왜 글을 쓰냐는 상투적인 질문에 수많은 작가들이 상투적으로 대답한다. 내가 보기엔 임발 작가의 소설이 가장 설득력 있는 대답이다. 부정적 감정의 해소. 임발 작가는 복수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한다.


나도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전에는, 힘들 때만 글을 썼다. 글쓰기가 마음을 차분히 해줄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다이어리를 폈고, 적다 보니 상황이 정리되고 격한 마음도 가라앉았다. 요즘엔 신이 나서 쓰는 경우가 더 많지만, 여전히 부정적 감정은 중요한 동원이다.


임발의 복수글은 불편하지 않다. 폭력적인 장면도 살짝 등장하지만, 얼굴을 찌뿌리지 않고 계속 읽을 수 있다. 그의 복수는 약자를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의 복수 트렌드는 참교육이다. 나를 무시해왔던 상대를 처절하게 복수하는 거다. 강자였던 상대가 약자인 나를 괴롭히지만, 일련의 성장과정을 통해서 강자로 거듭한 나는 다시 상대적 약자인 상대를 괴롭힌다. 강자와 약자의 위치만 바뀔 뿐이지, 결국 강자가 약자를 괴롭하는 방식은 동일하다. 그래서 볼 때는 통쾌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결국 강자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게 참교육 서사다. 이런게 임발 작가의 책에는 없다. 임발 작가는 겸손하고 올바른 사람이거나 아니면 겁이 많은 소심쟁이인가보다.


마지막 에필로그에는 복수로 독자를 위로하고 싶었다고 밝히며 이 의도가 얼마나 독자에게 닿을지 걱정한다. 사탕발림 같은 위로가 넘쳐나는 출판계에 솔직하고 시원한 책을 내는 임발. 그의 글을 계속 보고 싶다.


저만의 방식으로 위로하는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달콤한 말이 아닌, 대신 갚아주는 소소한 복수로 당신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제 글쓰기의 불순한 의도가 당신에게 얼마나 진심으로 가 닿을지 걱정됩니다. 2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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