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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Jul 08. 2019

질투난다 알보통

나 토라짐

 _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내가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것들이 다 나와있었다. 삶에 대한, 관계에 대한 통찰. 사람에 대한, 행동 그 너머에 있는 긴 이야기에 대한 이해. 다 자세히 나와있었다. 이런 것들을 이미 다 깨닫고 소설 형식으로 재미있게 써서 (재미는 사실 없었다) 내놓았고,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다니. 부러우면서 억울하고, 질투가 났다.


사실 질투할 이유는 없다. 나도 어디선가 주워듣고 경험하면서 짜깁기 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다. 나만의 고유한 무언가는 없다.


'영업 비밀'을 하나 털어놓자면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일단 블로그와 카페를 검색한다. 열 개 정도면 청탁받은 소재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가 잡힌다. 소생이 하는 일은 이걸 죄 퍼온 다음에 중복과 근거 희박을 걷어내고 인물이나 사건 하나를 주인공 삼아 흐름을 재배치한 후 내 말투로 바꾸는 것이다. 딱 그게 전부로 짧으면 한나절, 길어야 사흘이다.
 _남정욱 「'글쓰기 달인' 셰익스피어·茶山을 한번 봐… 글쓰기의 최상은 잘~ 베끼는 것이야」 2013-06-01 조선일보 기사


그리고 내가 먼저 생각한 좋은 아이디어라 하더라도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아이디어는 아이디어일 뿐. 완성작을 만들어내는 긴 여정의 시작일 뿐이다.


아이디어는 사업이 아니다. 사업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가장 큰 착각이 바로 그거다. 아이디어가 사업이 되기 위해선 수많은 장애를 넘어야 한다. 첫 번째 장애이자 초짜 대부분이 주저앉게 만드는 건 자본, 아이디어 하나로 손쉽게 자본을 모을 거라 여기는 건 사업을 해보지 않은 자들의 공통된 착각 중 하나다.
그러나 설사 자본을 마련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본도 결코 사업이 아니다. 자본은 반드시 소진된다. 처음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자본이 소진되는 속도는 공포다. 언제나 예상한 것보다 비용은 더 들고 수입은 예상치를 밑돌기 마련이니까. 그게 사업의 이치다. 당연하다. 시장에 갓 등장한 신참을 누가 주목하겠나. 아무리 아이템이 좋아도 시간이 소요되기 마련이다. ...
당신이 우여곡절 끝에 그 아이템의 론칭에 성공했다고 치자. 그럼 성공가도만이 펼쳐질 것이냐. 그 아이템의 성공이 입증되는 순간, 가장 먼저 벌어질 일은 똑같은 아이템을 당신보다 훨씬 더 나은 조건과 자본으로 덤빌 자들이 등장하는 거다. 반드시. 그게 시장이다. 그렇게 초기 시장만 열어주고 자기는 결국 사라져버리는 시장 개척자들 수두룩하다.
 _김어준 「건투를 빈다」


암튼,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이 책. 맘에는 안 들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포스트잇을 붙인 부분이 상당하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토라짐이다. 토라짐에 대한 그의 해석이 탁월하다.


토라짐의 핵심에는 강렬한 분노와 분노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려는 똑같이 강렬한 욕구가 혼재해 있다. 토라진 사람은 상대방의 이해를 강하게 원하면서도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설명을 해야 할 필요 자체가 모욕의 핵심이다. 만일 파트너가 설명을 요구하면, 그는 설명을 들을 자격이 없다.
 _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무시무시할 정도로 맞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나. 사랑하는 사람이 토라졌을 때 대응 방안도 설명한다.


토라진 연인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는 그들의 불만을 아기의 떼쓰기로 봐주는 것이다. 상대방을 어리게 취급하면 거만하게 윗사람 행세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만연한 탓에, 우리는 성숙한 자아 너머의 것을 바라보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내면의 아이를 만나는ㅡ그리고 용서해주는ㅡ것이 가끔은 가장 큰 특권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는다.
 _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외우자. 삶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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