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돔의 약속
작년 11월, 10년 만에 다시 방문했던 베를린 돔 대성당에서 마음을 차분히 하고 일어나 잠시 신세를 지던 대학 동기의 집으로 돌아가던 길.
성공적인 전시를 다짐하며 출국 길 공항에서 큰맘 먹고 난생처음으로 구입해 본 비싼 지갑을 잃어버렸다.
지갑에 대한 아쉬움보다도 그 안에 있던 나의 모든 신용카드와 현금 400유로가 함께 사라진 터라 정신이 아득해져 혹시라도 있을 법한 길목을 수차례 뛰어다니기 바빴다.
오랜만에 만난 (오랜 타지 생활로 고생 중이던) 대학 선배에게 밥도 사드리지 못하고 혼비백산인 채로 귀한 시간을 날려 버린 후, 그날 저녁에 있었던 다른 약속도 급히 파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현대카드 애플페이라도 가능했다면 조금은 상황이 나았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서비스가 개시되기 한참 전이었다. 독일 지하철 S반에서 잃어버렸다고 확신했기에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하여 분실신고를 겨우 접수하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영국 전시를 마치고 편안한 마음으로 베를린과 함부르크를 돌아보려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겨 급한 대로 친구에게 한화를 송금하고 유로 환전을 부탁해 나머지 여비를 마련했다. 그럼에도 어찌어찌 남은 일정을 소화했고, 꼭 필요한 만남만 성사되어 걱정보다는 알찬 여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날 저녁에 만나기로 했던 사람과 인연이 닿았다면, 아마도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은 영원히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그때 베를린 돔에서 간절히 바랐던 것은, 내 남은 예술 여정을 함께 완성시켜 줄 동반자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운명처럼 서로에게 동기부여가 되는 존재를 만났다.
처음엔 가혹하게만 느껴지던 사건들이 도대체 왜 일어난 걸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 그 일들이 그때 그렇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현재의 나는 없었겠구나’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허름한 함부르크의 호스텔 방, 그리고 평소라면 가보지 못했을 공항 근처의 낡은 스포츠 펍에서, 그때 내가 흐름을 거스르며 만들어 보려 했던 많은 것들이 무산되었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알지 못한 채 가을 한 움큼을 한숨에 실어 보냈던 날들.
그러한 날들이 필연적으로 있을 거라고 친절히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베를린 돔은 결코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2011년 처음으로 나를 프로 작가로서 환대해 주었던 독일이 2022년에는 또 다른 깨달음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다음에 방문할 때에는 내가 그곳에 더 많은 가치를 안겨줄 수 있기를, 가슴 깊이 고대한다.
정직하게 내가 그때 겪어야 할 것들을 겪게 해 준, 그리고 20대와 30대의 시간 중 가장 쓸쓸했던 순간을 함께 버텨 준 그 공간을 위해, 나는 무엇이라도 남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