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호주의 서울대 ANU

첫 출항 - 호주의 워홀러

by Joy Jo


내가 서울대 교정을 제대로 거닐어 본 건 천문학과 주최의 청소년 천문관측 강좌에 오갔던 그때뿐이었지만 그 어렴풋한 인상은 ANU에 대해 차츰차츰 알아갈수록 오버랩되어 되살아났다. 자국 최고의 법대, 의대, 공대, 인문대, 상경대가 있으면서, 음대와 미대를 포함한 예술대학도 그 대외적인 예우에 있어 빠짐이 없다는 닮은 점이 있기도 했고 교정의 느낌도 비슷했다. 예쁘다거나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건물들의 간격이 매우 넓고 산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녹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다.


예술대학은 음대와 미대로 나뉘어 있는데, School of Art라는 단과대명이 박힌 새하얀 건물이 바로 미술대학이다. 정원은 각 과의 한 학번당 12명 정도로, 나의 모교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던 고요함이 흘렀다. 개인에 할당된 작업공간은, 거짓말 시럽을 조금 첨가하자면 거의 운동장 수준이었다.


‘아, 이런 데서 조용하게 작업만 할 수 있으면 원이 없겠다.’


생각이 난 즉시 교무과에 회화과 교수의 연락처를 물어 면담을 신청했다. 면담일, 나는 이런저런 질문을 생각하며 길고 긴 복도 끝 하얀 미닫이 문을 열었다. 길고 푸석푸석한 회갈색 곱슬머리에 답답하게 생긴 안경. 누가 봐도 저 사람은 교수다. 과히 웃지도 않고, 말투는 건조하다. 나는 회화전공 석사과정에 대해 상담을 하러 왔노라며, 이런저런 이야기와 그림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내 말을 정말 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돌아올 대답은 확실해 보였다. 교수는 상당히 회의적이었고 곧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학부 3학년 졸업대상자들의 작업실로 나를 데려갔다. (3년제가 보통의 학사 코스이다.) 이 정도는 그려야 우리 학교에 들어올 수 있다는 식이었다. 문제는 그 작품들이 동양인인 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그리 멋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두 속칭 ‘노가다’성이 진한, 반복적 세부 묘사에 치중한 작품들이었다. 즉 그 사람은 내 지향점과 정 반대의 취향을 가진 교수였던 것이다. 입시체제가 달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국 학생들 사이에서 대상을 정밀 분석하여 밀도 있는 묘사를 하는 것은 그다지 크게 자랑할 일이 못 된다. 몇 시간 만에 쓱쓱 해치운 그런 그림 수 백장이 쌓여, 어느 한 날 미대를 들어가니까. 나는 그 잔재에서 가능한 한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고 싶었다.


시간이 슬슬 아까워져 나는 대강 감탄한 척을 해주고 빠져나왔다. 그 교수는 아마도, 수준 미달의 학생을 충격요법으로 잘 타일러 내보냈다는 승리감을 느꼈을 것이다. 후에 이 학교를 다시 밟은 2009년 어느 날, 나를 줄곧 도와주던 판화과 클래스메이트는 이런 말을 했다.


“네가 그 교수 밑으로 배정 안된 건 천만다행이야. 완전 꽉 막힌 사람이니까.”



ANU에서 만난 손톱 만한 봄.



춥고 떨리는 8월의 끝자락. 그렇게 학교탐방을 마치며 손톱 만한 봄을 만났다.


‘내가 많이 기다렸는데, 미안하다 봄아. 난 이제 가장 더운 여름으로 돌아가야 하고, 또 가을을 만나야 하고, 복학도 해야 해. 그래도 얼굴 보여줘서 고마워.’


그래, 정리할 것이 너무 많다.


찾을 것은 찾았으니,

이제 돌아가야 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