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y Jo Sep 30. 2024

삶이 내게 주는 미세한 신호

2장 - 우연과 인연이 스민 거울 앞으로



 새로운 방향으로 가기를 결정하고 나의 보폭과 걸음 속도에 더 이상 신경이 쓰이지 않을 때쯤, 그러니까 그 길이 이제 익숙한 내 길로 느껴질 때쯤 불현듯 삶의 중간 정산을 받게 되는 날이 온다.

 몇 주 전 어느 기부 행사에 참여했다가 지인들과 커피를 마시던 중, 우연히 길을 가다 내 목소리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 온 옛 동료를 이번 주에 따로 만나기로 했다. 엄밀히 말하면 월요일로 잡았던 약속이지만 한 번은 내가, 한 번은 동료가 일이 생겨 결국에는 수요일에 만났다.

 어떤 계획이 맘 같지 않게 틀어질 때 나는 막연히 ‘그럴 만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곤 하지만, 사실 거기에 큰 의미를 두는 편도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동료가 알려 준 것들은 나를 줄곧 이용하던 지인에 관한 진실이었고 그중 일부는 예상이 가던 바였으나 어떤 것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내가 기부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동료가 그날 나를 알아본 다음 용기 내어 말을 걸지 않았다면 아마도 영원히 모른 채 지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내 소중한 시간과 인력을 인정이라는 명목하에 계속 그 지인에게 쉽게 내어주었을 것이다. 왜 종종 그 사람이 나에게 무리한 부탁을 해오는지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나의 짐을 덜고 혼자 카페에 남아 글감을 정리하던 중, 나이가 지긋하신 두 어르신이 자리가 없어 바 테이블에 앉으시려는 걸 보고 마음이 동해 자리를 바꾸어 드리려 일어섰다. 내가 다른 자리로 가려는 것을 두 분이 극구 만류하셔서, 결국 같이 앉아서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다.

 한 분은 그 시절 흔치 않았던 여성 임원으로, 40년 커리어를 마치고 여생을 즐겁게 보내고 계신 화려한 싱글이셨고, 다른 한 분은 평생 화목한 가정을 일구고 영국인 사위와 딸, 그리고 손주 둘을 보기까지 도란도란 행복하게 살고 계신 멋진 어머니였다. 두 분의 삶과 성격, 말씀하시는 스타일은 모두 정반대였지만 서로 돈독한 절친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우연한 대화는 커피 석 잔을 연료로 해서 오후를 가득 채웠고, 덕분에 충만한 마음으로 카페를 나설 수 있었다. 두 분도 내 덕에 긍정적인 힘을 받았다며, 다음 전시에 꼭 오시겠다고 연락처를 받아 가셨다.

 오후에 하려던 일은 조금 미뤄졌지만, 각자 선택한 길을 훌륭하게 걸어오신 두 인생 선배님이 오히려 내가 하는 일과 앞으로의 계획에 조언을 해주시고, ‘길을 잘 찾았다’고 용기를 주셔서 조금 더 확신을 가지고 걸음을 재촉할 수 있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나와 같은 결의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전시를 보며 힘을 받기도 했다.


 삶의 중간 정산을 받는 날.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더할지를 계산해 본다.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상하게 정체되고, 노력과 열정을 쏟은 결과가 눈앞에 도무지 나타나지 않을 때마다, 삶은 내게 미세한 신호를 보내왔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8년까지, 답이 없을 것 같은 난제로 골머리를 앓을 때마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듯, 작은 힌트가 손에 쥐어졌다. 

 그렇게 우연이 내게 흔쾌히 내준 보너스를 감사히 받으며, 그만큼 가벼워진 한 걸음을 내디딘다.

이전 13화 뒤늦게 발견한 엄마의 재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