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 우연과 인연이 스민 거울 앞으로
한 번씩 그런 생각을 한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평생 악기를 만져 볼 기회가 없어 세계적인 연주자가 되지 못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살다 가는, 그런 일이 사실 비일비재하지 않을까?’하는 생각 말이다. 본인도 모르던 재능이 본능적으로 알게 모르게 삶 속에서 신호를 주었지만 이를 알아채지 못해서 평생 다른 일만 하다 죽는, 아무도 몰랐던 재능 낭비가 누적되어 전 인류가 막심한 손해를 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늘 있었다. 같은 맥락의 일이 우리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두 자매를 예술가로 키워 낸 우리 엄마는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도 손재주가 무척 좋으셨다. 요리는 물론 지점토나 솔방울을 이용한 공예, 뜨개질, 십자수, 원예 등 세밀함과 대상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잘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이든 척척 해내던 그녀였다.
어쩌면 그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야속한 세월은 20여 년을 더 쏜살같이 흘렀다.
평생에 걸쳐 언어 번역과 교육 일을 생업으로 이어 오신 엄마는 최근 들어서야 과일이나 채소 그림을 한 번씩 색연필로 그려 보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술 전공을 한 우리 자매보다 잘 그리시는 것이 아닌가? 또한, 시제품이 성에 차지 않아 세상에 없던 도안을 새로 짜서 미니어처 하우스를 뚝딱뚝딱 짓는 엄마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게 된 것도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엄마의 뛰어난 손재주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사물의 디테일을 전공자보다도 더 잘 살릴 줄 아는 관찰력과 세심함이 있었다는 걸 엄마 자신도, 또 우리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로는 알았는데, 왜 여태 실행해 보지 못했을까? 가족 중 누구 하나 ‘그러지 말고 그림을 좀 그려 보라’고 등을 떠밀었으면 좀 더 빨리 시작했을 텐데. 인생의 즐거움 하나를 놓치고 지나온 세월이 아쉬울 따름이다.
집안에 예술가가 전혀 없는데 갑자기 어느 세대에 이르러 예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툭하고 튀어나왔다면, 그 사람이 돌연변이라서가 아니라 윗세대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여태 실현해 볼 기회를 만나지 못한 숨은 재능을 품고 살아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우연한 기회로 우리 자신도 모르던 숨은 재능을 어느 날 문득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인생에 한 번은, 너무 늦기 전에 주변 사람들에게서 받을 수 있는 영향이나 영감을 마음이 가는 대로 한번 따라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잔잔한 파도처럼 쉴 새 없이 밀려오는 마음속 속삭임이 있다면. ‘나도 이런 걸 한 번 해볼까?’하는 호기심이 자꾸만 생긴다면, 몸을 움직여 무엇이라도 해보는 것이다. 목공에 관심이 생긴다면 컵 받침 하나라도 깎아서 만들어 보고, 화초에 관심이 생긴다면 미니 선인장 하나라도 사다가 책상 위에 올려놓고 매일 관찰하는 등의 아주 작은 시도 말이다.
이 작은 접점들이 모여 어떤 일로 이어질지는 아직 모른다. 아직은 희미한 마음속 신호를 꾸준히 찾아 들어가기만 한다면, 어느 순간 조금씩 선명해지는 다음 이정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될 때까지. 우연과 인연이 만들어 준 순풍을 등에 업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 보는 거다.
누가 아는가? 십수 년 후 우리 자매가 아닌 엄마가 더 유명한 원로 작가가 되어 있을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