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현실 속에서 나의 세계를 지키는 법
겨울에 들렀던 논산의 한 촬영 세트장. 드라마나 영화에 조예가 깊지는 않지만, 한때는 시나리오 경쟁에 매진하던 때도 있었다. 결국 학생들끼리 맞붙었던 A4용지 싸움에선 이겼지만, 비슷한 종류의 상상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 널려 있었고, 때마침 촬영 후 편집하던 도중에 같은 콘셉트를 가진 상업 영화가 개봉했다.
비록 학생 작품에 불과했지만, 결과적으로 대히트를 친 상업 영화를 따라 한 것처럼 보이는 작품을 완성하기란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편집본을 본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영화를 떠올렸고, 그때를 기점으로 나는 영화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내가 따라 하지 않았다고 한들, 어쨌거나 그 시점에 개봉한 영화의 시나리오는 몇 년 전에 완성된 것일 테니 집필 시점에 관해 논하는 것 또한 아무 의미가 없었다.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 여러 인물을 현실감 있게 다룬 허구의 이야기는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들며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그러나 그 작은 세계에 마침표가 찍히고 나면, 작품의 흥행 여부와는 상관없이 두 가지 경계가 그어진다. 존재와 시간의 경계가 그것이다.
잘 다듬어진 허구의 이야기는 이미 과거에 귀속됨에도 여전히 '존재'의 경계 안에 있다. 기억하는 이들이 있는 한, 작품은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대상을 반영한 허구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무수히 다듬어지며 10년이고 20년이고, 때로는 100년을 넘기면서까지도 거뜬히 존재할 수 있다. 현재가 아닌 과거의 시대를 반영한 이야기에도 이는 동일하게 작용한다.
과거와 현재가 반쯤 뒤섞인 촬영 세트장에서, ‘과거, 현재, 사실, 허구’ 네 개의 차원이 수없이 교차하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매시간 매초 과거로 떠밀려 가고 있는 완성된 이야기들. 머나먼 과거가 되고 나면 마치 허구처럼 느껴질 존재했던 사실들. 그러나 마침내 시간의 경계를 극복하고 인류의 기억 속에 영원히 새겨질 선택 받은 사실과 허구들.
온기 없이 진공이 된 이 특수한 공간이, 이제는 불멸의 존재가 된 작고한 배우들과 오래된 이야기들을 절로 떠올리게 했다.
장르가 무엇이 되었건, 그것이 사실이었건 허구였건, 결국은 경계를 허물고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만들거나, 그러한 누군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상할 염려 없는 건조하고 아름다운 글을 계속해서 쓰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 쓸쓸한 허구의 공간을 걷는다.
우리가 오늘 살아있기 때문에 느끼고 만질 수 있는 현실. 우리의 생이 다 하면 마치 허상처럼 사라질 현실 속에서, 아직은 가상처럼 느껴지는 각자의 세계를 진짜 현실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경험에서 우러난 단상을 끊임없이 기록하고, 그 기록을 가치 있는 묶음으로 엮고, 그 묶음으로 인해 세상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기며 간다면, 적어도 후회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때가 되면 허상처럼 사라질 일인칭 시야의 현실과 그 후에도 타인의 의식 속에서 발전하며 현실로 남을 생각들, 그 두 존재의 맞물림이 결국 우리의 인생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