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현실 속에서 나의 세계를 지키는 법
우리가 상식의 영역으로 이해하며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소위 당연한 것들. 세상이 굴러가는 이치나 사회의 일원으로서 응당 해야 하는 도리 같은 것들은 사실 각자가 가진 신념에 따라 그 의미와 역할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새벽에 일찍 일어나기’라는 하나의 작은 행동 목표를 파보면, 제각기 다른 목적으로 실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인이 속한 종교나 집단의 특성, 또는 개인의 생활 패턴과 상황에 따라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미라클 모닝’의 목적이 달라지는 것이다.
순전한 개인의 건강을 위해, 가족을 돌보기 위해, 종교적으로 의미가 있는 특정한 시간에 기도를 하기 위해, 심신 수련을 위해, 집단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자기 계발 비즈니스에 써먹기 위해, 또는 주변에 자랑하기 위해서도 행해지고 있는 이 ‘미라클 모닝’은 열심히 사는 사람의 생활 패턴에 당연히 수반되는 항목으로 여겨지곤 한다.
우리는 대개 누군가가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사는지에 대해서는 딱히 관심이 없고, 일찍 일어나고 다독하며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한다.
어쩌면 이 ‘당연함’이 만든 사각지대 때문에 사이비 종교나 유사 과학이 우리 사회 깊숙이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른 기상과 독서, 운동, 나아가 예술 활동 등 온갖 멋지고 무해한 것들을 개인이나 집단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가져다 쓸 수 있다는 걸 간과하기 때문이다.
잊을 만하면 대두되는 문화·예술계 특정 회사나 단체의 사이비 종교 연루 의혹은 언제나 음모론으로 치부되며 다시 수면 아래로 사라지지만, 정상적인 기능을 하는 종교나 그렇지 않은 종교나 그들의 교리를 자연스럽게 세상에 퍼뜨리기 위해 음악, 미술, 대중예술을 활용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설령 불순한 의도가 들어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는 표현의 자유가 있다. 그 때문에 기획자가 일부러 의도를 드러내지 않는 한,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을 수 있는 유해한 사상을 걸러내는 것은 언제까지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다.
개인적으로 지금은 무교이지만, 어릴 적 세 번에 걸쳐 탐독했던 성경 구절 중 이와 관련하여 기억에 남는 표현이 있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위 에베소서 2장 2절에 언급된 ‘공중의 권세’를 일각에서는 공중에 울려 퍼지는 방송 미디어나 음악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는 한 시대를 풍미하는 사상이나 유행을 빗대어 볼 수도 있겠다.
보이지 않는 정신적 영역을 두고 일어나는 싸움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일까? 정치와 종교를 막론하고, 이 ‘생각의 땅따먹기’를 위해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이 역사 속에서 각 집단의 이익을 위해 동원되었는가를 떠올려 보면, 작금의 사태가 마냥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는 해프닝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어쩌면 상식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우리의 정신, 생각, 바로 우리의 세계이다. 당신이 가꿔온 마음속 온전한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또한 타인의 세계가 그 나름의 이치대로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유해한 메시지를 담은 ‘무해하고 멋져 보이는 것’들을 한 번 더 여과해서 바라볼 수 있는 나와 당신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른들의 공중 권세 싸움에 어리고 순수한 이들의 세계가 희생되지 않기를 바라며, 내가 믿고 싶었던 당연함이라는 환상을 지워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