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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Jo Oct 25. 2024

감정을 정의하기 전, 직관하기

4장 - 추상 화가의 생존법


 잔잔하던 마음속에 느닷없이 일렁이다 파도처럼 번지는 감정의 물결. 그 감정을 정의하는 ‘기쁨, 슬픔, 분노’ 같은 단어를 떠올리기 전, 먼저 스치는 심상이 있다. 휘몰아치는 감정에 완전히 몸을 맡긴다는 생각으로 눈을 감고 가만히 온 신경을 기울여 보면, 감정의 색, 질감, 향, 혹은 밝고 어두운 정도가 마음속에 뭉근하게 느껴진다.

 같은 슬픔이더라도 어떤 것은 밝고 보드랍고 투명하다. 나에게 그 슬픔을 안겨 준 대상에 대한 사랑이 어려 있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슬픔에는 분노와 증오가 스며 있다. 분노가 섞인 슬픔은 아주 탁하고 무거워 뇌를 쥐어짜듯 나를 수축시킨다. 그런 종류의 슬픔에 매몰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밑바닥을 기며 다른 생물이 스치기만 해도 즉사시킬 수 있는 독과 전기를 지닌 심해어가 되는 기분이다. 마음이 적의로 가득 차는 것이다.


 한동안 나는 ‘분노 전문가’로 살았다. 타인을 위해 부당한 것에 대하여 목소리를 내고, 나의 에너지를 쏟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겼다. 그것이 내가 추구해야 할 정의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출처가 불명확한 옅은 정의감에 휘둘리는 동안, 나는 누군가에게 분명 필요한 존재였다. 주변 사람들은 서서히 힘든 일이 생기거나, 억울한 일이 생기면 나를 먼저 찾기 시작했다. 역시 이런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그리고 어쩌면 해결해 줄 수도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며 위안을 얻어갔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의 사고회로는 분노 외의 동력으로는 움직이지 않게끔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나는 어느덧 뇌 한쪽에 분노의 공간을 늘 남겨두고 사방에서 분노의 원료를 끌어다 들이붓는 삶을 살고 있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강렬한 에너지에 중독된 것이 틀림없었다.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크게 화를 내야만 하는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울감을 극복하기 위해 제 발로 찾아간 생애 첫 심리 상담은 정작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짚어주지는 못했지만, 작은 단서를 하나 남겨 주었다.


 “그래서, 아영 씨. 그 사람들이 아영 씨의 책상을 붙잡고 일을 못 하게 했다거나 물리적으로 압박을 가한 적이 혹시 있었나요?”

 그런 일은 없었다. 그건 단지 나와 타인에게 일어난 분노의 불씨들을 한데 모은 데 따른 결과였고, 이는 사실 모두 관념의 영역 안에 있었다. 정신적으로 휩쓸리고 망가진 것들이 외부로 드러나, 더는 하루도 일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뿐이다.

 회사에 잘못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지만 그것을 단죄하고 해결하는 일은 사실 나의 몫이 아니었다. 그때 있었던 온갖 부조리한 일들 때문에 퇴사한 사람은 나를 포함해 단 두 명뿐이었고, 분노로 이어진 인연의 끈은 짧디짧았다.

 그러한 일들은 이후 몇 년 동안 심심치 않게 일어났는데, 하나의 분노의 장이 결말에 이르면 등장인물은 어느덧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더 이상 그 일련의 과정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당연히 그러한 인연들은 좋은 일이 있을 때 나를 찾지 않았다. 나는 그들 인생의 ‘분노’ 페이지에 잠시 등장하는 조력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분노는 어떤 종류이건, 그것을 가지는 것이 정당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담아두고 있는 시간 동안 내 마음에 화상을 입힌다. 

 내가 느끼고 있는 기쁨과 슬픔, 행복, 두려움, 욕망의 기저에 분노와 증오가 도사리고 있다면, 감정에 어울리는 행동에 나서기 전 그것을 먼저 분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앞서 ‘숨은 적 골라내기’ 파트에서도 언급했지만, 어떤 큰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며 새롭게 다가오는 사람이 은근슬쩍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분노와 증오를 보태며 부정적인 에너지를 증폭시키려 한다면 가차 없이 끊어내야 한다. 사건 해결과 감정 해소, 두 가지 면에서 모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선한 영향력만 끼칠 것 같은 사랑과 연민의 기저에도 오만과 선민의식이 숨어 있을 수 있다. 물론 불순물이 섞인 금이라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 기간 나의 동력이 되었던 믿음과 그 믿음을 촉발한 감정의 실체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를 때,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때 밀려들 거대한 자괴감과 싸우고 싶지 않다면, 최초의 감정, 그 심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매 순간 행동을 촉발하는 감정의 순도를 직관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한다면, 삶 속에 산재한 모순들이 하나, 둘, 드러나 이윽고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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