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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Jo Oct 21. 2024

하나의 상만 남기고 모두 제거하기

4장 - 추상 화가의 생존법


 몇 해 전, 네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던 한겨울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 한 명씩 중환자실에 들어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처음으로 외할머니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긴 투병으로 야위어 힘없이 놓인 왼손은 마치 복사·붙여넣기를 해 놓은 듯, 나의 왼손과 그 크기와 손톱 모양 하나하나 똑 닮아 있었다. 

 여기저기서 ‘도대체 왜 음식점을 안 내느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요리를 굉장히 잘하셨던 외할머니가 숱하게 밥을 짓고, 도토리묵을 쑤고, 겉절이를 담그고, 칼국수를 치대고, 갈비찜을 찌는 동안 단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던, 나와 똑같은 조그맣고 야무진 손. 

 넓적한 아치형 대문 같은 엄지손톱, 새침하게 좁은 약지손톱, 뾰족한 계란을 닮은 검지손톱. 그 하나하나의 상이 뇌리에 깊이 박혀, 각 손톱의 모양만 화면 안에 커다랗게 남긴 5점의 연작을 그렸다. 공중에 떠 있는 손톱은 세대와 세대를 잇는 창을 의미한다. 

 오늘도 쉴 새 없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내 뭉툭한 손끝에는 외할머니의 시간이 새겨져 있다. 할머니의 할머니, 그 할머니의 할머니까지, 어쩌면 눈치채지 못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을 이 작은 아치형 손톱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방대한 시간이 깃들어 있다.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하나의 상만 남기고 모두 제거하고 나면 그 단순한 이미지에서 연상되는 것들이 있다. 내가 처한 상황과 맥락 안에서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연상의 자료가 된다. 

 책 사이에 끼워 둔 낙엽 하나가 어느 해 가을의 기억을 순간 머릿속에 가져다 놓듯, 구체적인 추상은 지난 경험에서 추려낸 이미지 속에 그때까지 느꼈던 가장 중요한 기억과 생각을 압축한다.

 슬픔보다는 세대를 넘어선 연결을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던 애도의 기간. 일손이 부족하여 이틀간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며, 잊고 지내거나 전혀 몰랐던 친척들, 가족의 가까운 지인들, 앞으로 가족이 될 소중한 인연까지 쉴 새 없이 맞이했다. 희미한 연결선이 다시, 또는 새롭게 그어졌던 만남과 헤어짐의 사흘이 아니었나 싶다. 

 언제 다시 기울일지 기약 없는 술잔에 아쉬움과 슬픔과 반가움을 담뿍 담아 맞부딪치며, 내 손에 남겨진 세대의 창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 작은 아치형 손톱 하나에서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커다란 그림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문득 매일의 일상이 의미 없게 느껴진다면, 내 눈앞에 선명히 보이는 것 중 가장 중요한 모양이나, 하나의 생각거리가 무엇인지 찾아보도록 하자. 

 당신의 시선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현재’는 지금 어떤 모습인가? 그 현재를 대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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