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현실 속에서 나의 세계를 지키는 법
우리 둘째 고양이 카이는 노란 털을 지닌 치즈 고양이답게 매우 낙천적이다. 치즈 고양이들은 먹는 것을 잘 가리지 않고 덩치가 크며 사람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치즈냥’이라고 부르지만, 영국에서는 생강 색과 비슷하다고 해서 '진저캣'이라는 별칭을 쓴다.
집안에 같은 종이라고는 둘밖에 없으니, 사람도 고양이도 좋아하는 카이는 어릴 적부터 7살 터울 첫째 고양이 모찌를 졸졸 쫓아다녔다. 그러다 예민하고 앙칼진 삼색 고양이, 모찌에게 ‘하악’하고 욕을 먹거나 앞발 펀치를 얻어맞기 일쑤였지만 말이다.
강펀치를 몇 번 맞고 나면, 카이는 쭈뼛거리다 자기 영역으로 돌아가 아무렇지 않게 본인 할 일을 했다. 부지런히 털도 고르고, 집사들에게 간식도 보채다가 침대에 철퍼덕 누워 한잠 늘어지게 자는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첫째 고양이를 찾아 나선다. 가드를 한껏 올리고 때릴 준비부터 하던 첫째도 어느 순간부터는 포기한 듯, 아주 가끔은 귀찮은 인사를 받아 주었다.
아주 드물지만, 때때로 코 키스도 하고, 엉덩이 냄새를 맡는 것도 허락해 주었다. 여담이지만, 고양이들끼리 엉덩이 냄새를 맡는 건 신분을 알 수 있는 명함 교환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첫째가 둘째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기까지, 꼬박 3~4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계속되는 거절 때문에 둘째가 우울증에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놀랍게도 둘째 녀석은 셀프 스트레스 관리를 집사보다 잘했다.
녀석의 노하우는 이렇다.
1. 첫째의 영역을 존중해 준다.
2. 개의치 않고 다시 시도한다.
3. 마음대로 안 되는 날엔, 푹 쉰다.
4.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5. 매일 할 일을 그냥 한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는 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다시 또 '오늘도 반가워!'를 외치는 치즈 고양이의 끈기와 긍정. 진짜 긍정이란 이런 것 아닐까? 서로의 영역을 지켜 주되,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매일 먼저 손 내미는 것. 매일매일 자기가 할 일을 무념무상으로 ‘그냥 하는’ 것.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고양이는 참으로 부지런하다. 자는 듯해서 돌아보면 쉴 새 없이 앞발, 등, 배, 엉덩이, 꼬리의 털 매무새를 만지며 혀로 그루밍을 한다.
또 어느샌가 싹싹, 파파밧! 소리가 나서 보면, 자기가 본 용변에 열심히 모래를 덮고 냄새가 안 나나 꼼꼼히 킁킁대며 만족스러울 때까지 화장실을 정돈하고 나온다.
고양이가 무슨 아침마다 미라클 모닝을 외치며 ‘오늘은 부지런해지겠어!’ 다짐하는 것도 아닌데, 어쩜 그리 매일 깔끔을 떨며 냄새 안 나게 사는지 참 신기한 노릇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집사에게 다가와 칭찬은 됐고, 배나 만져 달라고 뒹굴거린다. 또 한껏 게으른 척을 하며.
“아냐, 너 잘나서 좋겠다고!”
허허, 웃으며 배를 쓰다듬는다.
목표를 덕지덕지 붙여 놓고 호들갑을 떠는 인간 집사와는 다르게, 무념무상으로 매일 할 일을 ‘그냥 하는’ 고양이는 집사보다 한 수 위였다.
나의 스승이 되어 주었던 치즈 고양이 카이. 녀석의 긍정과 부지런함을 아직 다 배우지도 못했는데, 홀연히 고양이 별로 떠나버린 나의 5살 난 스승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잘 적응하고 있을까?
녀석의 보드라운 털에서 풍기던, 햇볕에 바짝 마른빨래 냄새가 사무치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