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 추상 화가의 생존법
특정 도시나 카페, 계절 등, 특정한 시간의 구간이나 물건, 공간이 과거에 저장된 정보나 어떠한 심상을 떠올리게 한다면, 혹은 나의 행동에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면, 그것이 곧 내가 알아내고 싶은 생각의 본질로 다가가는 유도선이 될 수 있다.
생각 소재들에 관한 단편적인 정보를 습득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탐정처럼 집요하게 파고들며 사건의 점들을 이어 보면, 이윽고 전혀 다른 그림이 된다. 마치 별들을 직선으로 이어 놓은 별자리처럼 말이다. 단순한 별의 이음새 뒤편으로 화려하게 수 놓인 12궁성의 도면은 실제 밤하늘이 아닌,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상상 속에 그려져 있다.
나의 경우, 글이나 새로운 그림 작업이 잘 되었던 기간을 되돌아보면 대부분 겨울이었다. 겨울의 무엇이 나를 이제껏 가장 넓은 보폭으로 움직이게 했을까? 하나씩 되짚어 보며,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탐색했다.
그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바로 안도감이었다. 멈춰도 되고 한껏 느려도 괜찮다는 안도감.
겨울에 태어나서 그런지 몰라도, 내게 겨울은 긴 시간 숙성한 생각을 끄집어내기 좋은 계절이다. 연말, 연초 잠깐을 제외하면 약속을 잡을 일도 별로 없고, 모두 자신만의 이불 속에 폭 파묻혀 한나절 손끝이 노래지도록 귤을 까먹는 즐거움을 누리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추위 속에 손을 놀리면 그것이 펜이든 붓이든 정제된 모습의 무언가가 나온다. 생각이 마구 내리꽂히지 않고 정돈되는 느낌이다. 눈꽃이 거추장스러운 후드득 소리 없이도 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가 사뿐히 안착하듯 그렇게. 뜨거운 손끝에 닿은 눈은 순간 녹아 사라지지만, 그 결정 하나하나가 지닌 저마다의 아름다움은 녹지 않는다. 안온한 상태에서 그린 그림은 내게도, 관객에게도 오래도록 남는다.
이 계절이 주는 것들이란, 오랜 기억을 꺼내어 두어도 상하지 않을 것 같은 온도, 어떤 찰나의 장면이 스치더라도 새어 나가지 못할 밀도, 양껏 늘어놓은 생각들이 쉬이 휩쓸려가지 않을 수 있는 무게감, 그리고 이 모든 것들로 온몸에 휘감기는 짙은 안도감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겨울이 아니더라도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에게 제공한다면 계절을 타지 않고 생산성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비닐하우스에서 기른 것보다는 제철에 난 과일이 항상 더 맛있지만 말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이번에는 도시다. 그런데, 이번에는 런던이나 서울, 멜버른 같은 특정 도시의 개별적 특성을 지우고 생각해 볼 것이다.
어떤 도시에 새롭게 발을 붙이고, 생활하고, 사회의 일원이 되어 얼마간 살아 보면서 공통적으로 느꼈던 점이 있다. 그건 바로 공간 깊숙이 새겨진 보이지 않는 아우라이다.
눈을 감아도 같은 공간 안에 사람이 들어오면 인기척이 느껴지듯, 도시의 스카이라인이나 조경의 변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각 도시가 지닌 에너지가 있는 것 같다. 날씨와는 무관하게 밝아도 음울한 곳이 있고, 어두워도 공간의 느낌이 따뜻한 곳이 있다. 아마도 그건 그 도시를 스쳐 간 많은 사람들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도시의 내면적 풍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 것은 2010년께부터다. 어떤 도시라고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라는 공간과 그 안팎으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우주 공간 어딘가에 떠돌고 있을 것이라 상상해 본 작품이 바로 ‘Nightscape In The Universe’이다. 별이 폭발한 잔해와 가스가 가득한 성운처럼, 한 도시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도 도시의 아우라만은 우주 어딘가에 남아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까?
이후에는 ‘내면의 풍경’ 연작으로 매 순간 움직이며 변화하는 도시의 아우라를 표현하기도 했다.
눈으로 보이는 풍경뿐만 아니라 살갗으로 느껴지는 도시의 인기척을 따라 ‘보이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여행’을 이어가며, 보이지 않는 생각을 또렷이 응시하는 법을 터득해 가는 것 또한 인생 여정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