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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Jo Oct 29. 2024

새삼스럽게, 이방인처럼

4장 - 추상 화가의 생존법


 아주 평범한 물건의 이름 하나를 반복해서 입으로 되뇌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단어와 그 이름으로 불리는 물체가 분리되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마치 읽을 수 없는 간판으로 가득한 거리를 걷는 이방인이 된 것처럼, 당연하게 다가오던 뜻과 소리가 휘발되고 껍데기만 남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필’이라는 단어의 소리와 의미, 그 의미에 부합하는 길쭉하고 뾰족한 이미지의 연상이 갑자기 우리 머릿속에서 사라진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 연상된 것들을 똑, 떨어뜨려 본 후 단어의 생김새 자체를 축소했다가, 또 확대했다가, 돌려보기도 하며 이리저리 관찰하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암묵적인 약속과 지식 공유 체계인 언어가 새삼 신비롭게 느껴진다. 

 글자를 어떻게 쓰는지, 어떻게 발음하는지조차 모르는 외국어를 배울 때 느끼던 그 생경한 느낌 그대로,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완전히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떨까? 매일 마주하는 물건이나 감정 또한 새삼스럽게 여길 수 있다면.


 서로의 일상을 권태롭게 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다른 문화권에 거주하고 있는 이방인의 시선으로는 그저 새롭듯, 제삼자의 시선으로 나의 하루를 관찰하면 흥미로운 지점이 생길 수 있다.

 남들과 비슷한 삶처럼 흘러가고 있다고 해도, 분명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의미 가중치를 부여하고 있는 어떠한 단어가 있을 것이다. 그 단어가 지칭하는 구체적인 대상과 그 뒤에 숨은 추상적인 의미를 떠올려 보면, 그 안에는 나의 지난 경험과 앞으로 하고 싶은 일, 나아가서는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가 보일 듯 말 듯 스며 있다.

 혼자 있을 때, 누군가 강제하거나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부단히 나의 삶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생활 속에 가랑비처럼 스며들어 어느덧 습관처럼 자리 잡은 것들 말이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타이핑, 자꾸만 칭찬하게 되는 사람, 연신 탄성을 내지르게 만들었던 메뉴, 비둘기처럼 매번 돌아가게 되는 장소, 느슨한 오후를 닮은 재즈…… 똑똑, 가슴을 두드리는 단어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순간적인 소비와 휘발의 영역을 벗어난 진짜 좋아하는 것 찾는 법. 그 정답을 우리는 사실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사는 도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다른 대도시에서 워케이션을 하는 기분으로, 언제든 문득, 내 삶의 이방인이 되어 보는 거다. 

 추가하는 한 방울, 한 방울의 원액에 따라 완전히 다른 향의 커스텀 향수가 완성되듯, 말과 글과 생각의 원료가 되는 단어들의 성질에 따라 내 삶 또한 다르게 채워질 수 있다.

 아직은 알 듯 말 듯 한 내 인생의 향. 내가 추가하고 싶은 풀 향과 프리지아 향, 물안개 향이 나는 단어는 과연 어떤 것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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