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y Jo Oct 30. 2024

구체성과 추상성의 렌즈를 끼고

4장 - 추상 화가의 생존법


 사석에서나 글을 올리는 채널들을 통해 종종 '어떻게 하면 그런 표현을 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 들어오곤 한다.

 나는 어디서 따로 작문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고, 어릴 적부터 지속해 온 관찰과 표현의 방식을 글쓰기에도 적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쌓여 온 것이 그림이나 음악으로 발현되어 그 길을 갔던 것이고, 글 또한 표현의 한 장르에 불과하다. 

 표현할 대상과 그에 대한 나의 관점이 먼저 존재해야 자연스럽게 표현이 나온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입력이 잘 되어야 출력도 잘 나온다. 그리고 이걸 컬러로 출력할 것인지, 종이는 인화지를 쓸지 일반 A4 용지를 쓸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따라서도 알맞게 결정해야 한다.

 그림으로 해야 할 것이 있고, 음악으로 해야 할 것이 있고, 반드시 글로 써야 할 것이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한 마디는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세상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대상들이 존재함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는 문학, 음악, 영화를 아우르는 예술 애호가이기도 했다.

 예술가라고 해서 태어날 때부터 평생 표현할 것들을 다 가지고 태어나는 게 아니다. 살아가면서 매일 부딪쳐오는 것들을 흡수하고, ‘나의 관점’이라는 필터로 거르며 쉼 없이 뽑아낼 뿐이다.

 구체성과 추상성의 두 가지 렌즈를 장착하고 나의 색감과 질감, 온도가 더해진 특유의 필터로 멋을 더하면, 그건 곧 나라는 장르가 된다. 일관성 있는 관점으로 꾸준히 자신만의 필터를 발전시켜 나가면, 장르를 불문하고 누구나 자신이 온전히 드러나는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다.


 누구나 각자의 인생 여정에서 유독 자주 등장하고, 가깝게 손끝에 붙어오는 소재들이 있다. 

 나의 경우에는 어릴 적 자주 들여다보던 천체사진이 그랬다. 우주에 관한 막연한 동경은 온라인, 오프라인 할 것 없이 나로 하여금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 했다. 중학생 주제에 겁 없이 온라인 카페를 만든다든가, 대학에서 주최하는 청소년 천체 관측 행사에 참석하는 등, 처음으로 가족, 친구, 학교의 울타리 바깥의 세상과 교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매개가 된 건, 일상 저 바깥에 있는 우주였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속한 삶의 터전임에도 그 광대함 때문에 여전히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우주 덕에, 구체성과 추상성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생각과 활동의 영역을 확장해 갔다.

 어른이 되어서도, 우주는 권태로움을 이겨내는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일과에 파묻혀 지내다 보면 만사 무뎌질 때가 있다. 손이 야물어져 큰 어려움 없이 과업을 해내게 되는 긍정적인 무뎌짐도 있지만, 그를 기점으로 삶 속에 권태가 찾아들면 그만큼 괴로운 것도 또 없다.

 그럴 때 나는 뒤로, 뒤로, 인식의 렌즈를 한껏 풀어 우주 밖 관찰자가 되는 연습을 한다.

먼저 도시가 점이 되기까지 물러선다. 그러고는 지구가 원으로 보일 때까지 더 물러나 이윽고 점이 될 때까지, 우리은하가 소용돌이로 보일 때까지, 그 소용돌이가 다시 점이 될 때까지, 점이 된 은하의 무리가 한눈에 들어올 때까지, 인식의 여행을 계속한다.

 이제 여기에 멈춰 서서 생각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광대한 우주를 유영할 줄 아는 내가 그토록 괴로워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이 풍경 속 티끌의 티끌보다 작은 그 무엇이 나를 고뇌하게 하는지, 스스로 되묻는다. 그러면 그 바깥의 바깥에서 관찰한 오늘의 결말이 밀물처럼 하루의 나머지를 채운다.

 책이 안 읽히면 카페나 도서관에 가듯, 삶이 안 읽히면 저 바깥, 우주에 잠시 머물러 보자. 바깥에서 깨달음을 얻고 나면, 렌즈를 당겨 순간 복귀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이다.


 구체성과 추상성이라는 두 개의 렌즈로 세상을 탐험하며 나를 발견하고, 지키고, 발전시키고, 재정의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이뤄야 할 평생의 과업이 아닐까? 

 우주보다 광활하고, 원자보다 미세한 우리 내면의 세계를 가꾸면서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