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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Jo Nov 08. 2024

나를 살게 하고, 또 죽게 하는 것

4장 - 추상 화가의 생존법


 무더위 끝을 수놓는 세찬 빗줄기, 가을의 존재를 잊은 듯한 녹음, 주렁주렁 다리에 걸린 빗방울의 무게에도 의기양양한 풀벌레, 진짜 오렌지라도 맺은 양, 싱그러움을 내뿜는 과실수 조화.

 우연히 들른 어느 가게 비밀의 문 뒤에서 만난 존재들은 자연과 인공의 중간 그 어디쯤에서, 그 엉성한 타협점을 의도적으로 문지르고 있는 빗물에 총연출을 맡긴 채 나를 맞이했다. 생각지도 못한 벽장 뒤의 공간에는 이곳이 너무나도 당연한, 많은 사람이 그들의 취향을 담은 와인을 한 잔씩, 두 잔씩 홀짝이며 정확히 같은 아로마의 단어들을 다시 뱉어내고 있었다.

 와인 한 잔과 스낵을 들고, 창가 자리에 앉아 오늘 아침잠에서 덜 깬 흐릿한 의식이 다급히 기록해 놓은 한 문장을 가지고 스무고개를 이어 간다.



 ‘나를 살게 하고, 또 죽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를 살게 하는 것도 가능성, 죽게 하는 것도 가능성이다. ‘가능성’에 포함되는 모든 재능, 재주, 성격, 체력, 지식, 지능, 그리고 호기심과 친화력이 빚어낸 오만 잡다한 ‘할 줄 아는 것들’, 그것도 꽤 잘하는 것들. 그런 것들 말이다. 재주가 서 말인데 무엇하나 쓸모 있는 재화로 꿰어져 나오지를 않으니, 공인된 가치로 치환되지 못한 그 모든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이 오히려 이곳저곳에서 주목받던 어린 재주꾼에게 ‘이제 어른이 될 시간이 지나고도 한참 지났다’라며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그럼에도 아직도, 마르지 않는 ‘가능성’ 표피에 끊임없이 물을 뿌리고, 해를 피하고, 개미를 피해 말라죽기 직전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보이지도 않는 앞을 향해 전진하며 몸을 누일 흙을 찾아내고 있는 나도 참, 대단히 느리고 생명력이 질긴 지렁이가 아닐 수 없다.

 아주 작은 실마리를 찾아, 그것을 잊지 않고 정확히 다시 찾아내고 내가 알지도 못했던 생경한 공간과 새로운 기회를 찾아내는 일이 이제는 꽤 익숙하다. 그러니 한동안은 이 ‘나를 죽일 수도 있는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에 기대어(그래도 아무것도 없이 말라죽는 것보다는 나으니) 관측하고 발견하기를, 그렇게 해내는 것이 ‘해내는 것’으로 무겁게 표현될 일도 없이 그냥 숨 쉬듯 가볍게 지속하며, 가능성을 연명해 나가려고 한다. 손실이든 수익이든, 나는 결국 최적의 시점을 찾아내어 내가 가진 가능성의 결과를 실현하는 날을 결정할 것이다.

 자신이 가진 가능성이 극대화되는 시점은 7살이 될 수도, 70살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이미 늦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7살에 이루는 성공이란 본인의 의지보다는 부모의 역할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성공일 테니, 그것보다는 본인의 의지로 내린 결정이 조금 더 쌓인 이후에 가능성을 폭발시키는 게 조금 더 매력적인 것 같다.


 당신은 어떠한가? 아무런 형체도 없고, 어떠한 질감도 손끝에 느껴지지 않는 가능성의 중첩들 속에서, 당신은 진실로 무엇을 발견하기를 원하는가?

 사실 모든 것은 비밀에 부쳐져 있다. '내가 원해서, 어느 시점부터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이러이러했기 때문에 내 모든 가능성을 엮어 결국 이런 사람이 되었다'라고, 우리가 함께 이 비밀의 문 뒤에서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될까?

 아직은 희미한 이 가능성 하나를 가지고, 나는 오늘도 정답이 없는 추상 일기를 끄적인다. 결국은 무엇이든 해낼, 나를 알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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