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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Jo Nov 04. 2024

화가가 말아주는 추상 칵테일

4장 - 추상 화가의 생존법


 이제껏 너무 무거운 이야기들만 잔뜩 늘어놓은 것 같아, 마지막은 소파에 기대어 느슨하게 즐길 수 있는 장으로 준비했다. 좋아하는 마실 거리 한 잔이 곁에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집에 마실 것이 없는 분들을 위해, 처음으로 캔버스가 아닌 잔에다 그려 본 나의 첫 추상 칵테일을 소개한다. 술을 즐기시는 편이라면, 편의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한 번 만들어 보시기 바란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즐겨 마시는 리큐어, ʻ캄파리’로 만든 나의 첫 창작 칵테일, ʻ밤바다’. 사실 빨간 술에 파란 시럽을 타는 것이니 당연히 보랏빛이 날 거라 예상했는데, 진한 쪽빛으로 물드는 잔을 바라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수평선의 경계가 모호한 밤바다가 대번에 떠올랐던, 오묘한 색채.

 ʻ밤바다’는 드라이진과 베르무스, 캄파리를 1:1:1로 섞는 칵테일 ʻ네그로니’를 변형하여 베르무스를 빼고 레몬과 배 주스를 넣어 만든 칵테일이다. 진 특유의 쌉싸름한 약초 맛을 살짝 덜어내고, 보다 깔끔하게 빼 준 것.

 먼저, 충분히 칠링한 칵테일 잔에 주재료인 캄파리 1oz를 넣는다. 소주잔이 보통 50ml이고, 1oz는 약 30ml이니, 만일 계량 가능한 전용 지거가 없다면 소주잔을 꽉 채운 후에 1/5 정도 더 채워 넣어주면 된다. 얼음 잔에 캄파리만 채워 넣어도 아주 붉고 예쁜 산호색이 나온다.

 다음은 레몬과 배 주스를 0.5oz(약 15ml)씩 넣어 준다. 칵테일은 기본적으로 주재료에서 부재료 순서로 따라주면 되기 때문에, 레몬즙과 배 주스의 순서는 크게 상관없다.

 아직 저녁노을이 채 지지 않은 듯한 이 붉은 잔에, 푸른 색소를 넣은 오렌지 증류주, ʻ블루큐라소’를 넣으면 밤바다가 완성된다. 블루큐라소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거의 모든 파란 칵테일에 쓰이는 재료로, 요즘에는 편의점이나 마트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파란 시럽이 더 무겁기 때문에, 처음 붓고 나면 또렷하게 층이 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상태로 즐겨도 무방하기는 하지만, 쪽빛을 완성하려면 바 스푼이나 머들러로 잘 섞어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감귤 빛에 가까운 건망고를 올려주면, 색채의 대비를 아름답게 연출할 수 있다. 꼭 건망고가 아니더라도 노란빛을 내는 레몬 슬라이스나 자몽 껍질을 가니쉬로 올려 주어도 좋다.

 만약 도수가 너무 세게 느껴진다면, 취향에 따라 토닉이나 플레인 탄산수로 당도와 도수를 동시에 조절해 주도록 하자. 레시피 그대로 만든다면 약 20도, 탄산수 150ml를 추가하여 희석한다면 화이트 와인과 비슷한 10도 정도의 도수로 즐길 수 있다.

 시원한 밤바다를 마시며, 열병처럼 강렬하게 지나간 지난 몇 달을 곱씹는다. 칠흑 같은 우주를 건너 고양이 별에 도착했을 나의 영원한 아기 고양이와, 울화만 남긴 소송. 불타는 진홍색과 고요한 진청색이 뒤섞인 이 한 잔과 꼭 닮은 봄이었다.

유성우의 긴 꼬리처럼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솟구치는 기포를 가만히 바라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시간이 꽤 흘러도 느려지지 않는 기포는 줄기차게 위로, 위로 향한다. 강렬한 탄산은 목젖에 걸린 못다 한 말들을 이내 삭이고 분해해 버린다. 솟구치던 그 까슬한 탄산은 곧이어 턱 막힌 가슴을 뚫어내고 아스라이 사라진다.


 답답한 일들이 한 무더기라도, 그중 어떤 한 가지라도 생각했던 것보다 멋진 모습으로 삶 속에 드러나기 시작하면, 마음에도 숨 쉴 구멍이 생긴다. 그 한 가지 멋진 일이 유보 상태로 머물던 난제를 타개할 희망의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당장의 해결책이 아니더라도, 심리적 균형을 되찾는 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창작 칵테일을 가지고 시음회를 열게 되리라는 생각도, 여기에 맞는 페어링 메뉴가 따로 개발되리라는 생각도 애초에 하지 않았지만, 생각지 못한 일들이 예상치 못한 도움을 만나 차곡차곡 멋지게 이어지는 경험을 통해 지친 심신에 활력이 생기기도 했다.

 기대하던 일이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이렇게 멋진 일들은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잘못 접어든 샛길에서 발견한 맛집, 궂은 날씨 덕에 만난 설경 같은 것들 말이다.

 애쓰던 일들이 속절없이 꼬인다면, ‘도대체 얼마나 더 멋진 일들이 생기려고 이러나?’라는 주문을 한숨 대신 마음속에 살포시 불어넣어 주는 건 어떨까?


 우리 함께, 오늘을 추상하며 밤바다를 항해하자.

 칠흑 같은 밤을 지나 새로운 정박지에 다다를 우리를 위해, 건배를 외친다.





창작 칵테일 '밤바다' 레시피



[준비물]

캄파리, 블루큐라소, 드라이진, 배 주스, 레몬즙 크래프트 얼음, 건망고, 지거, 바 스푼, 칵테일잔


[취향에 따른 옵션]

가니쉬는 블루와 대비되는 노랑-주황 컬러를 띠는 어떤 재료이든 OK (e.g. 레몬 슬라이스, 오렌지 필, 자몽 등)


[레시피]

1.     크래프트 얼음으로 미리 칠링한 잔에 캄파리 1oz를 따른다. (약 60ml)

2.     뒤이어 헨드릭스진 1oz를 따른다.

3.     레몬즙 0.5oz를 넣는다.

4.     배주스 1oz를 추가해 준다.

5.     디카이퍼 블루큐라소 시럽 0.5oz를 넣는다.

6.     취향에 따라 탄산수나 토닉워터로 당도를 조절하면서 잔의 나머지 부분을 채운다.

7.     가니쉬를 잔 한쪽에 꽂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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