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희망과 자기 소개서가 빼곡히 담긴 A4용지를 공중에서 파닥거리며 내 목소리 톤이 살짝 올라갔다.
멀뚱멀뚱 눈을 깜박이는 아이에게 보란 듯이 종이를 들이밀었다. 어디 해명을 해보시지.
"아~ 이거 청소부를 빠뜨렸네."
1호는 굴러다니던 몽당연필 하나를 주워 반듯하게 청. 소. 부 글자를 이어 썼다.
"갑자기 쓰레기 청소부는 왜?"
"청소하는 것도 좋고, 깨끗한 걸 보면 기분이 좋아서."
그래? 그렇단말이지... 그래도 이건 너무 아무런 전조증상 없이 찾아온 꿈이 아닌가!
1호가 일곱 살 겨울 때였다. 남들 다 다닌다는 피아노도 싫다, 미술도 싫다, 수영도 싫다 하며 학원 알레르기를 보인 1호가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사교육은 축구교실이었다. 체험수업에서 볼이 빨개져라 열심히 공을 쫓아다니며 축구라는 세계에 입문한 1호는 여덟 살, 아홉 살, 열 살을 넘어 열한 살까지 공과 함께 살았다.
"선생님, 1호가 어떻게, 좀... 축구를 하나요?"
"네... 정말 잘하는 친구들은 바로 보면 알고요, 1호는 아주 좋아하면서 열심히 합니다."
넘나 객관적인 눈으로 객관적인 멘트를 주시는 원장님 아래 1년, 2년, 3년이 흐르는 동안 그저 좋아 열심히 뛰던 1호는 종종 외부팀과의 경기에서도 골을 넣기 시작했다.
"어머님, 다음 주에 안양팀과 친선경기가 있는데 1호 시간이 될까요? 저희 팀에 1호가 꼭 필요해서요."
오. 역쉬 한우물만 파면된다더니 드디어 이 아이도 그간 학원비가, 아니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점차 축구에 자신이 붙은 1호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장래희망란에 자랑스럽게 축구선수라고 적었다. 쉬는 시간 무조건 운동장으로 나가, 이름도 모르지만 친구라고 부르는 또래 아이들과 뭉쳐서 축구하기에 바빴고, 늘 땀인지 비인지 모를 것들에 흠뻑 젖어오곤 했다. 신발 해지는 속도가 빨라지고 이에 비례해서 허벅지가 단단해졌다. 2학년, 3학년이 지나가도록 축구는 그야말로 목숨이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냥 두지 않았다.
"의사는 어때~ 변호사 하면서 축구할 수도 있어!" 외할아버지의 바람.
"우리 집에서 정치가 한 명 나왔으면 좋겠는데, 박사도 좋고!" 친할아버지의 지나가는 말씀.
"스포츠매니저도 있고, 스포츠마케터. 축구팀 닥터도 있어.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래?" 아빠의 제안.
"나는 그냥 손흥민 같은 축구선수가 되고 싶은데 왜 자꾸 어른들은 다른 걸 말해?"
약간 짜증 섞인 투로 아이가 말했다.
아. 미안하다. 응원을 못할 바에 반대는 하지 말 것을. 그래그래. 응원해주자!
나도 동참해 축구에 올인해보자 마음먹었다!
인천 유나이티드 FC 경기도 보러 다니고, 월드컵 친선경기에 축구 페스티벌도 챙기다 보니 유소년 축구단이란 게 있다는 걸 알았다. 찾는 자에게 길이 보이는 법.
이강인도 인천에서 축구를 시작했다지! 이러다 스페인 가나요~
꿈에 부풀어 벌써 마음은 맨유까지 가버렸다. 토트넘도 좋고!
"아니, 나는 그냥 여기 축구교실이 좋은데."
뭐야. 유소년단 축구부를 완강히 거절하는 게 아닌가.
이리저리 협상해 보았지만 그저 동네축구가 좋단다.
6개월간의 구애에도 꿈쩍도 안 해서 그래 그럼 즐겨라 하고, 유럽 진출에 대한 부푼 가슴을 추스르는 사이 코로나가 찾아왔고 그나마 다니던 동네 축구교실마저 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을 뿐이다.
"축구선수는 어쩌고? 일곱 살 때부터 축구 선수되고 싶어 했잖아!"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따지듯 물었다.
"엄마, 이것 좀 바. 나도 이런 게 왜 생겼는지 모르겠어."
씁쓸해하는 아이의 시선을 따라간 곳은 아이의 배 언저리..
그렇다. 단지 몇 달 축구를 쉬었을 뿐인데, 코로나 시국 탓인지 뭔지 알 수는 없으나 아이는 그사이 10킬로가 쪄있었다!
겨우내 한창 잘 먹어 오구오구 해줬을 뿐인데, 스스로 꿈을 포기하는 지름길인 줄 아무도 몰랐다.
본능적으로 아이는 현실의 몸을 직감했고, 앞으로 펼쳐질 축구선수로의 길이 본인의 길이 아니라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주위에서 추천해준 장래희망을 가장한 직업리스트들을 과감히 떨쳐 버리고 본인이 나름 할 수 있는 종목을 찾았다. 그것이, 환경미화원이다.
콜!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므로, 나는 아이의 새로운 꿈을 지지해주기로 했다.
난, 쿨내 나는 아들 엄마이고 싶으니까!
"환경미화원 되는 것도 엄청난 체력훈련이 필요해! 몇 백대의 일의 경쟁률을 뚫어야 되거든! 축구할 때만큼이나 더 기초체력을 키워야 될 거야. 각오는 되어 있지?"
"1호야~ 오늘은 목요일이다.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이야. 자 봐봐, 박스에 붙은 테이프는 다 뜯어내야 해. 종이는 종이끼리, 플라스틱은 플라스틱끼리, 깡통이랑 병도 따로 버려야 해. 자 해보자!"
"1호야, 일요일이야. 오늘도 이거 분리해서 버리러 가자. 자, 컵라면 용기는 어디다 버려야 할까? 과연 계란 껍데기는 음식쓰레기가 아닐까 맞을까? 일단 이 상자부터 나르자. 나가서 정리하는 게 빠를 거 같아."
"줌 수업해야 하는데, 너 책상이 이게 뭐니! 장래 환경미화원으로써 이런 정리안 된 책상은 절대 안 되지. 모든 정리에는 분류가 우선이야. 어떻게 정리할 거야? 먼저 책상부터 시작해볼까? 그다음에 책장, 그다음에 서랍 정리를 도전해보자!"
며칠 뒤, 1호가 말했다.
"엄마, 나 청소부 힘들 거 같아. 그 꿈 포기할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아이는 꿈을 접었다.
살도 빼고 정리정돈도 할 수 있는데, 이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라며, 재차 물었지만 번복하는 일은 없었다.
내가 너무 과한 응원을 한걸일까? 난 그저 아이의 꿈을 현실화하도록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꿈꾸지 않는 열한 살의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아이는 열두 살이 되었다.
서로 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느새 잊혀 가는 단어가 되고 있었다.
"나 고양이 키우고 싶어."
"엄마는 할 수 없어."
"산타할아버지에게 빌어도 돼?"
"산타할아버지는 생명을 주시진 않아."
"고양이 정말 키우고 싶은데......"
"그럼, 나중에 독립해서 너 혼자 살게 되면 그때 고양이 키워~"
"진짜? 정말이지?"
"그럼~너 집에서 네가 키운다는데 엄마야 상관없지."
"엘리베이터 없는 1층 주택에서 냥이랑 같이 살 거야. 그게 내 꿈이야!"
꿈.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 꿈이다.
어울리는 옷을 입은 듯 왠지 그 꿈은 1호에게 잘 맞아 보였다.
축구복, 의사 가운, 양복, 미화원 조끼를 입은 1호의 모습보다 작은 마당 한편에서 고양이랑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1호의 모습이 더 편안하게 다가왔다. 그래 꿈이 꼭. 직업일 필요는 없지. 앞으로 마주할 인생의 어느 한순간을 꿈으로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운동선수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순간을 꿈꾸듯이, 1층 주택에서 냥이랑 노니는 꿈이라. 은근 부럽네. 어느 지역의, 몇 평의 주택을 꿈꾸는가라는 질문은 일단 넣어둬, 넣어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