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어. 하며 영상을 다시 처음으로 돌려준다. 딱히 궁금하지 않은데. 굳이 실과를, 지금?
3학년 때 친하게 지냈던 단짝 친구 A와 B는 4학년 때 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그런데, A가 갑자기 B를 험담하기 시작한다. 다른 친구들도 B를 놀리기 시작하고, B는 점점 이유를 모른 채 왕따가 되었다. 그렇게 4학년을 보내고 5학년이 된 아이들. B는 다행히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며 학교생활을 적응해가고 있었다. 어느 날 A가 친구들의 놀림을 받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다. B와 눈이 마주친 A가 갈 곳을 몰라하고 있을 때, B는 나서서 친구들에게 말한다.
"이건 나쁜 행동이야. 난 지금 A의 마음을 알아.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별거 아닌, 캠페인 같은 영상인데 뭐랄까... 가슴에 뭔가 콕 찔렀다.
"4학년 때 자기를 왕따 시킨 아이를 용서해주고 구해준 거야? 와 대단하다."
"응."
"이게 재미있었어?"
"응."
"어느 부분이 재미있었어?"
"그냥. 좋잖아."
"1호는 혹시 학교에서 이런 적 있었어?
"아니~"
뭐야, 아니라고... 잊은 건가? 좀 상황이 달라 그런 건가?
애써 그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을 수 있으니까. 내가 먼저 꺼내지는 말자.
1호의 2학년 공개수업 날.
1호가 오늘 학교에서 발표는 안 할 거라고 다짐을 하고 갔기에 큰 기대는 안 했지만 학교에서 수업하는 아이를 마주한다는 건, 그냥 설레고 떨리는 일이다. 1호가 뒷자리에 앉아있어 잠깐 어수선한 틈을 타서 다가가 인사를 했다. 반가워하며 쑥스러워하는 아이를 보다가 손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 뭐야? 언제 다쳤어?"
"짝꿍이 지우개 빌려가며 긁었어."
에? 살점이 움푹 파였는데. 피가 나고 속살이 보이는데, 지우개 빌려가며 긁은 거라고? 짝꿍은 야무지게 생긴 여자아이였다. 뭐라 더 물어볼 새 없이 수업은 시작되었고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수업 후 선생님에게, 아이에게 상처가 있으니 보건실에 갔다 올 수 있냐고 요청하는 것뿐. 교실을 나와야만 했다.
며칠 뒤, 1호가 체육시간에 있던 일을 말해주었다. 여전히 같은 여자 짝꿍 C가 줄넘기로 뒤에서 목을 졸랐다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일. 1호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애들 몇몇에게도 그러했다고 한다. 단순 실수나 장난으로 넘길 일은 아니지만 뭘 어떻게 대처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답답하고 속상했지만 겉으로 상처가 나거나 다친 게 아니라 그런 장난? 의 위험성과 그런 일은 바로 선생님께 알리라 일러주고, 타들어가는 속을 정리했다.
얼마 후, 다른 반 아이의 엄마가 연락이 왔다. 복도에서 C가 1호의 신발을 멀리 던져서 1호가 외발로 뛰어 신발을 가지러 갔다는 것. 심지어 C가 1호의 볼을 잡고 당기며 웃고 놀았다는 것. C가 1호를 좋아하는 거 같은데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의견까지 전해줬다. 혼란스러웠다. 1호에게 사실 확인을 묻자 맞다고 하며 금방 자리를 피해 2호랑 논다. 속도 없는 놈. 다시 끌고 와 재차 묻자 표정이 어두워진다.
밤새 망설이다가 다음 날 선생님에게 연락을 드려 위험한 장난에 대한 주의를 부탁드렸다. 다음 날, 선생님은 아침 조회시간에 1호와 C를 복도로 불러내어 자초지종을 듣고 C가 1호에게 사과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문제는, 일주일 뒤쯤 왔다. C의 엄마가 연락이 온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냐며. 자기에게 직접 이야기하지 학교에 직접 연락한 것에 서운함을 내비쳤다. 학교에서 일어난 일인데 굳이 따로 연락하기 불편해서 그랬다 하고, 이미 지난 일이니 아이들 서로 잘 지내게 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저녁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지우개를 가져오며 손톱에 살이 살짝 스쳤을 뿐이고, 체육시간에 줄넘기를 던졌는데 그게 1호 목에 걸렸고, 누구신발인지몰라 던졌을 뿐인데 선생님이 다짜고짜 사과하라고 시켜서 아이가 억울해한다고. 저녁 내내 이야기하며 울고 있다고. 억울하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전후 사정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지 않고 사과시킨 것이 못내 아쉽다며.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아. 그랬군요. 선생님이 좀 더 세심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다 고의가 아니라 어쩌다 그런 거라서 억울하다는 거죠. 네. 알겠습니다.
줄넘기로 목 조른 애들이 1호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과 신발 던지고 사과도 안 하고, 볼 잡아당긴 건 뭐냐고 따져본들 뭐하리. 당사자가 억울하다는데. 그럴 수 있구나 하고 그냥 털어 버리자 했다. 그래도 한 번 그렇게 선생님 눈에도 띄였고 실수든 장난이든 고의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건 알겠지, 학교생활하며 서로가 규칙은 잘 지키겠지.라고 믿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면 되는 줄 알았다.
"1호 엄마, 어떡하냐. 내가 다 속상해서 연락했어. 지금 통화돼?"
일하다 갑작스레 받은 전화. 불길했다.
C가 요즘 들어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데, 그중 거의 매일 맞는 애가 1호라는 사실이었다. 1호가 맞는 걸 보다 못해 말리다가 되려 맞고, 애가 악몽을 꾸는 탓에 얘기하다가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애들을 때린다고? 누가, 누구를? 꽤 오래되었다는 얘기에 놀라움보다는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그저 듣고만 있었다. 전화를 끊고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1호의 가장 친한 친구네 연락해서 사실 확인을 물었다. 그 엄마도 금시초문이라 의아해하며 아이에게 물어보고 말해주었다.
"어쩌냐, 한 달 동안이나 계속 맞았대. 거의 매일. 발로 배를 차고, 머리를 잡고 흔들고 그랬다는데? 선생님 없을 때..." 털썩 주저앉았다. 1호가 뭘 잘못한 게 있나? 무슨 오해라도? 지난번 억울한 거 때문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퇴근 후, 1호와 마주 앉았다.
정말로 매일이냐고 묻자, 자기 기억에는 5-6번이란다. 주로 중간놀이 쉬는 시간, 그냥 이유 없이 때리고, 하지 말라고 해도 때리고, 큰소리로 외쳐도 때리고 친구들이 말려도 때리고... 아니 왜 그간 말을 안했냐고!!! 질문이 계속될수록 아이는 위축되었고 말이 더 없어져갔다.
"C가 왜 그랬을까? 우리 같이 끼즈 카페라도 가서 만나서 이야기해볼까?"
"싫어."
"지금도 짝꿍이야?"
"지금은 아니야. 돌아가면서 하는데 두 번 정도 했어."
"너가 혹시 C에게 장난하거나 놀렸어?"
"아니!"
"그런데 왜 너를 때려. 너는 안 때렸어?"
"나는 안 해. 그리고 C는 다른 애들도 때려."
그날 잠을 어떻게 잤는지 모르겠다. 일요일이었고, 담임선생님에게 상담 문자를 보내 놓고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낸 후 월요일 오후 하교 후에 학교에 갔다. 처음 전화를 주었던 친구 엄마가 동행해주었다. 선생님은 알고 있었는지 C와 같이 1호의 머리를 잡고 흔들었던 다른 여자애 D도 불러서 이야기를 미리 하신 모양이다. C가 하니 D도 동참해서 한 모양. 대체 교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C가 친구가 없어요. 그런데 애들과 놀고는 싶고, 1호 주변에는 늘 친구들이 많다 보니 놀고 싶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 거 같아요. C가 워낙 어릴 적부터 성공의 경험이 많다 보니 본인이 주도해서 성취하기를 원하는 성향이 크고, C의 부모도 학업에 관심이 큰 사람들이라 C에게 크게 기대를 하고 있어서 자기를 방어하면서 존재감을 알리고 싶은 게 폭력으로 나타났던 거 같네요."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선생님, 이 세상 모든 부모는 자기 자식에게 관심 갖고요, 그만큼 기대를 해요. 그렇다고 그게 폭력으로 표현되지는 않아요. 그리고 교실에서 일어난 일이면 아셨을 테니까 좀 더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제가 이틀 출장 갔을 때 임시 선생님이 있던 기간에 일어났었나 봐요."
"애들 말로는 기간이 꽤 길었다고 해요. 횟수도 이틀 안에 일어날 일은 아니었고요."
학교 폭력에 회부하실건가요?
짧은 침묵 후에 온 선생님의 답변? 이자 질문이었다. 그러면 안되는데,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난 무얼 하고자 학교에 온 걸까? 학교에 무얼 기대하고 온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아니요, 선생님. 9살이지만 C가 아직 친구 사귀는 방법을 모르나 보네요. 친구에게 어떻게 다가가는 게 좋을지, 친구는 어떻게 사귀는 건지, 선생님이 좀 수고스럽겠지만 C에게 알려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그리고 1호는 C와 함께 활동하는 게 불편하다고 합니다. 되도록 교실에서 자리를 떨어뜨려 주셔서 같은 모둠활동 안 하게 해 주셨으면 좋겠고요, 가능하다면 내년 3학년에 같은 반 안되게 부탁드립니다."
흔쾌히 대답을 주신 선생님은 그 뒤로 정말로 자리를 떨어뜨려주셨고, 1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학교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학교 알리미를 통해 담임선생님은 명예퇴직을 알려왔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2학기 새로 온 선생님에게 3학년 반편성 때 C와 떨어뜨려 달라고 부탁드렸다. 다행히 선생님께서 이해를 해주셨고, 적극적으로 자기표현을 안 하는 1호를 위해 불러서 마음 상태를 체크해주신다고 했다. 선생님 덕에 2학기를 무사히 보내고 1호는 3학년이 되었다. 학교폭력이란 단어는 잊고 지냈다. 그러면 되는 줄 알았다.
4학년. C와 또 같은 반이 되었다.
다행인지, 코로나 전 세계를 뒤흔들어놨고, 개학이 미뤄지더니 5월 말이 되어서야 주 1회 등교로 전환되었다. 그 사이 C는 동네 수준이 낮아서 이 동네서 교육을 이어갈 수는 없다며 옆동네로 이사 갔다. 후진 동네면 어떠리. 폭력 없으면 되지.
1호가 그때의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지금은 정말 다 잊은 건지 궁금하다. 저리 편한 자세로 학교 폭력 영상을 즐기고 있는 걸 보니 고맙고, 기특할 뿐. 기억 한 켠의 일을 애써 꺼내고 싶지 않으면 아직은 그냥 두고 싶다. '축구는 당장 끊고 태권도를 보내!'라는 아빠의 요청을 거절하며 꿋꿋하게 축구를 했지만 지금 남은 건 뱃살. 그래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오늘 본 영상을 보고 1호는 과연 어느 부분이 좋다고 할 걸까. 기억 저편에 있는, 괴롭고 답답했던 마음을 이겨내고 B가 A를 위해 용기 내어 말한 부분이었을까? A가 자기의 나쁜 행동에 대한 대가를 받은 부분이었을까?
그러면 되는 줄 아는. 당연하게 일어나도 되는 일은 이 세상에 없다.
때려도 되는 아이가 있지도 않고, 맞아도 되는 아이가 있지도 않다.
앞으로 1호는 그 무섭다는 중2 시절도 보낼 것이며, 반 어른 고등학교 시절도 보낼 것이다.
C보다 더 한 친구도 만날 것이고, C보다 더한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어른이 되어 가는 여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당연하게 그래도 되는 일이라고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