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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Jan 18. 2022

일단 쓰는 글 2.

지갑 속 만 원 한 장.

2. 집을 나서자마자 집 앞 사거리를 대각선으로 건너 코너에 있는 S 은행의 ATM 코너로 향했다. 그 ATM기는 평소 주로 거래하는 은행이 설치한 기계도 아니었지만, 그건 별로 상관이 없었다. 늘 해왔던 대로이기에, 지금 여기에서 인출이나 송금을 한다고 해서 수수료가 붙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내가 우수 고객일 리는 없으니, 오래 거래를 했거나 은행 나름의 사정에 따라 그리 된 것이리라. - 별로 급한 일도 아니니 느긋한 마음으로 기계 앞에 선다. 보이스 피싱과 관련한 내용을 천천히 청취하고 카드를 넣고 출금을 누른다. 그리고 만원. 촤르르르- 하는 다소 경박한 소리와 함께 녹색 지폐 한 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별로 반갑거나 그런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애초에 ATM 기계라는 것 자체가 물성이 없던 나의 현금을 물성이 있는 지폐로 바꿔주는 것 밖에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나. 아무튼, 오늘 집에서 나와 처음으로 한 일은 이 만 원짜리 한 장을 출금해 지갑 속에 넣는 일이었다.


언젠가부터 만 원짜리 한 장을 지갑 속에 넣어 다니는 일이 습관처럼 생겼다. 계기는 이렇다. 어떡하다 보니, 서울에서 차를 운전하게 되었고, 심각한 주차난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발렛 파킹을 맡기게 된다. 사실, 발렛을 맡기려고 했다기보다는 약속이 있었던 강남의 한 식당에 주차를 하기 위해서는 발렛 파킹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고나 할까. 그때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차와 차키를 넘겨주고 식사를 맛있게 했었더랬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니, 더할 나위가 없었지. 깝깝한 상황이 날 기다리고 있을 줄도 모르고 말이다.


자연스럽게 차키를 건네받고 시동을 걸었다. 함께 식사를 나눈 이들을 모두 먼저 보내고 주차장을 나서려는데, 처음에 상냥하게 차를 건네받았던 관리인이 뛰어와서는 발렛비를 내야 한단다. 속으로 아차, 싶었다. 그치. 여기는 서울이고, 땅값 비싼 서울에서, 그것도 강남에서 주차를 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하고 말이다. 관리인이 요구한 금액은 4,000원. 아직도 정확히 기억이 난다. 나는 미안하다는 내색을 하며 지갑을 열었다. 지갑 속에 카드만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로. 정말로 당황했다. 차라리, 차의 시동을 켜기 전이었거나 주차가 그대로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 길로 가까운 ATM기, 아니면 편의점이라도 찾아 들어가서 만 원짜리 한 장 뽑아와서 주면 되는 건데. 이 상황은 딱, 자동차고 오고 나가는 길목에 차가 정차되어 있는 상황. 어떻게 내리지도 못하고, 뒤에는 또 다른 차가 출차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진땀이 바싹바싹 난다.


어떻게 방법이 있나. 정말 미안하다며 지금 당장 현금이 없어서 그러는데, 혹시 계좌 이체는 안 되겠냐고 묻자. 또 그쪽의 사정이 있는지 오직 현금만 받는단다. 옴짝달싹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아마도 세상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런 나를 붙잡고 있는 관리인의 표정도 만만찮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짜증과 강남에서 주차 처음 해보느냐는 듯한 멸시, 그리고 어떻게든 해보라는 채근. 뭐 이런 온갖 부정적인 표정이 한가득이다. 아니, 나도 주고 싶은데. 그냥 5,000원짜리 하나 주고 1,000원은 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인데. 지갑 속이 텅텅 비어있는 걸 어떡하나. 그렇게 미묘한 대치가 30초 정도 흐르고, 내게 정말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관리인은 '현금 좀 들고 다니라'는 짜증 섞인 핀잔을 주고는 돌아섰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며 창문을 올리긴 했지만, 그때 내가 느낀 감정도 굉장히 복잡했다. 어쩐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자책의 마음과 어쨌든 지불해야 할 값을 치르지 못하고 나왔으니 들고 마는 미안함과 찝찝함이 있었고. 또 한 편으로는 왜 현금만 받는 건지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은 상황에 대한 짜증과 괜히 도둑놈으로 몰린 것 같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에 대한 화 같은 것들이 함께 치밀어 올랐다. 그래도 뭐 어쨌든, 내 지갑 속에 그 4,000원이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할 말은 없지만.


미국 여행을 다녀온 뒤로 지갑 속에 넣어 다니는 2달러짜리 지폐 외에 - 행운의 2달러다. - 만 원 한 장 정도, 못해도 천 원짜리 몇 장 정도는 지갑 속에 꼭 넣어 다니게 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두 번 다시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날 혹시 뒷자리에 누구라도 앉아 있었다면, 물론 그 사람에게 잔돈이 있어서 상황을 더 쉽게 해결할 수도 있었겠지만, 함께 난처한 상황을 지나는 일까지 벌어졌다면 나는 더 불행했을 것이므로.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뭐. 그 덕에 소소한 행복을 누리게 된 것도 있다. 큰돈은 아니지만 지갑 속에 현금이 항상 들어 있으니 마음에 여유가 조금 생겼다고 할까. 오고 가며 보이는 붕어빵이나 국화빵, 군고구마 같은 간식거리를 보고 아쉬움을 삼키지 않아도 되고. 쓰레기봉투 같은 경우에도 편의점이나 몇몇 가게에서는 현금만 받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도 번거롭지 않게 되었다. 또, 영화관이나 큰 쇼핑몰에서 간혹 보이는 오락실을 한 번씩 기웃거릴 수 있게 되었는데, 하루빨리 농구 기계의 실력을 쌓아야 할 이유가 있으므로 이 또한 내게는 큰 힘이 된다.


그날 이후로 서울에서 발렛 파킹을 할 일은 없었으므로 - 사실 나는 자차도 없거니와 서울에서는 운전할 일이 거의 없다. - 지갑 속 현금이 그때와 같은 상황에서 쓰인 적은 아직 없다. 그래도 가끔 생각은 해보는데, 그때가 오면 굉장히 여유 있는 모습으로 발렛비를 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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