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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Jul 12. 2023

[BIFAN 23] 마이크로웨이브 러브

제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코리안 판타스틱 : 단편


**이 글은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복도를 걷고 있는 것 같아요.


계속되는 공모전 탈락 소식과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는 전혀 무관한 업체로부터의 연락.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작가 지망생 지은(문지원 분)에게 어느 날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어떤 암호처럼 들리기도 하는 장음과 단음의 이 소리의 시작점은 집안에 있던 전자레인지. 전원 코드를 뽑아도 멈추지 않는 이 기계의 소리는 알고 보니 모스 부호로 걸어오는 그의 말이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나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존재처럼. 지은과 전자레인지, 두 존재는 그렇게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권찬영 감독의 영화 <마이크로웨이브 러브>는 인간과 기계가 소통하며 서로의 외로움을 채워준다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처음부터 아름답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시작점은 어둡고 좁은 방 안에서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꿈 하나만 바라보며 홀로 살아가는 젊은 세대이며, 그들의 삶 여백에 공허하게 남아있는 커다란 공백을 비춘다. 그 공간을 채워주는 존재로 선택된 것이 바로 기계, 전자레인지가 되는 셈이다. 사람의 눈과 코를 닮은 다이얼 두 개와 손잡이, 반짝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내부의 불빛. 영화는 두 존재의 만남과 그 사랑의 과정을 통해 관계의 형성과 변화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02.

영화가 사람과 기계를 만남의 주체로 설정한 것은 지은이라는 인물이 홀로 남겨진 방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전자기기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와 그렇지 못한 존재를 만나게 하기 위함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영화는 꼭 두 번의 그런 상황을 이끌어낸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공모전에 낙심한 지은이 전자레인지에게 관심을 쏟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와 마침내 공모전에 뽑히고 난 이후 행사장에서 만난 남자(박성환 분)와 호감을 느끼며 만나기 시작했을 때의 순간이다.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두 존재가 같은 공간에 있을 때는 서로를 바라볼 수 있지만 움직일 수 있는 쪽이 공간을 떠나게 되는 경우 홀로 남겨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더해지는 하나의 경우는 같은 공간에 있어도 교감을 나눌 수 없는 경우, 즉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쪽은 자신의 시선이나 관심의 방향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기에 상대가 바라봐주지 않을 경우 같은 공간에서조차 홀로 남겨지게 되는 상황이다. 감독이 이 두 가지의 경우 모두를 위 장면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 작가가 되고 난 이후 홀로 남겨지게 되는 전자레인지의 모습은 작가가 되기 전 혼자였던 그녀의 모습과 정확히 오버랩된다. 글을 쓸 때 가장 행복하지만 아무도 자신의 글을 읽어주지 않을 것 같다던 지은의 말이 역시 그녀를 바라볼 때 가장 행복하지만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는 순간의 전자레인지 모습과 일치하는 이유다. 두 대상의 소통이 처음으로 이루어졌을 때 지은이 외로워 보여 말을 걸 수 있었다던 전자레인지의 말을 생각해 보면, 짧게나마 이제 다른 사람과 세상으로 인해 외롭지 않은 그녀가 기계에 불과한 그의 말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03.

이제 막 시작되는 자신의 새로운 기회와 챕터 속에서 과거의 소중한 것들(마이크로웨이브 러브와 같은)을 잠시 잊었던 사람이 신데렐라의 12시를 지나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홀로 남겨져 있던 소중함은 이제 다른 존재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지은이 주었던 사랑 속에서 자신이 따뜻해짐을 느꼈던 것처럼 이제는 반대로 자신이 따뜻함을 줄 수 있는 대상을 만나게 되었고, 그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건넬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이다. 잠시 눈을 돌린 사이에도 떠나버릴 수 있는 사랑의 속성을 이 짧은 대화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마음을 파고든다.


“고마워, 나도 네가 없으면 그냥 전자레인지인 거잖아.”


이제 사람은 두 번 다시 기계와 대화를 나누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사랑이었음은 지금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조금씩 더 크게 느껴갈 것이고, 자신이 사랑했던 것을 사랑할 수 있었을 때를 진심으로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전자레인지가 없으면, 자신 또한 그냥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은도 이제는 안다.



권찬영 / 한국 / 2023 / 27 min

World Premier / 12+

코리안 판타스틱 :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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