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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Mar 14. 2019

겨울에 피는 꽃

삽목, 발가벗긴 몸뚱이처럼 원초적인 단어

 툭툭 붙여놓은 것 같은 줄기 끝에 소녀의 젖멍울처럼 어색하게 맺혀있는 꽃망울들이라니. 더군다나 끊어내었던 줄기에도 마르지 않고 살아서 꽃 하나를 머금고 있는 낯선 풍경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스스로 삽목이 된 것이다.


 마침내, 자줏빛 꽃을 피웠다. 내 몸속에서도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른 것 같다. 저 삭막하고 뭉텅한 줄기에서 이토록 수줍은 사랑을 토해놓은 것이다. 아무래도 꼭꼭 문을 닫게 되는 겨울에 슬며시 비집고 들어와 얼어붙은 마음마저 녹여줄 것처럼 관능적으로 숨을 고르고 있다. 엄동설한에 피는 꽃. 나와 너의 사이를 규명하는 적당한 거리를 무너뜨리고 만지고 싶은 유혹이 들었다.


 눈이 내리는 어느 겨울날이었다. 눈을 털어내며 꽃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눈 속을 빠져나와 조금 거리를 두고 서서 마음에 내리는 눈을 맞고 싶었다. 유리창 밖으로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김 서린 안경을 벗어 들었을 때 초점이 흔들리는 눈발과 자줏빛 꽃의 대비.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이거 무슨 꽃이에요?”


 줄기가 게의 앞발을 닮았다고 해서 게발선인장으로도 불리지만, 꽃을 피우는 시기가 겨울이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선인장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뿜어내는 대표적인 공기정화식물이다. 발암물질로 알려진 포름알데히드와 가전제품에서 발생하는 전자파를 제거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선인장은 다른 관엽식물에 비해 손이 많이 타지 않지만, 화분의 흙이 어느 정도 말랐는지 손의 감각으로 목마름을 가늠해야 한다. 선인장과 이기 때문에 물이 과하면 금방 썩어버리고 물 주는 시기를 놓치면 금세 푸석해진다. 소리로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더 마음을 졸이게 하는 것 같다. 어디가 아프면 아프다고, 배가 고프면 배가 고프다고 소리로 전달하는 생활에 익숙해져 버린 나에게 손으로 더듬는 법을, 눈으로 읽는 법을 알게 해 준 식물이다.


 나는 집 안에 화초나 관엽식물이 있는 집을 부러워했다.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분무기를 뿌리며 잎을 닦아내거나 꽃을 매만지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그럴듯한 그림이 걸려 있는 것 같은 교양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화분을 살 때마다 성가시다는 아내의 핀잔이 못내 서운하다. 하지만 화분이 늘어갈수록 교양의 정점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열등감을 화분이라는 굴레에 가두고 치장하려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이 난다. 충분하게 영양분을 공급하려고 비료를 주고 애써 흙을 더듬는 의식은 어쩌면 지나친 자기만족일지도 모른다.


 웃자라는 줄기들이 있다. 다른 줄기들에 비해 빨리 조숙해 버린 일련의 조급증의 소산일 것이다. 다른 줄기들이 웃자란 줄기를 치고 올라와서 보란 듯이 키를 맞추기를 바랐지만, 스스로 더 초라해지는 것만 같았다. 고민 끝에 웃자란 부분의 줄기를 끊어내기로 했다. 그냥 버리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주기라도 할 것처럼 뿌리도 없는 줄기를 흙에 고이 놓아두었다. 시간이 지나면 바싹 마른 앙상함에 적당한 감정을 표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 날의 숙연함을 잊었다는 표현이 맞다. 툭툭 붙여놓은 것 같은 줄기 끝에 소녀의 젖멍울처럼 어색하게 맺혀있는 꽃망울들이라니. 더군다나 끊어내었던 줄기에도 마르지 않고 살아서 꽃 하나를 머금고 있는 낯선 풍경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스스로 삽목이 된 것이다.


 삽목, 발가벗긴 몸뚱이처럼 원초적인 단어이다. 꺾꽂이를 말한다. 삽목을 할 나무에서 가지 일부를 잘라 내어 땅에 심으면 원래 뿌리가 아닌 자리에서 뿌리가 돋아난다. 식물은 모든 세포에서 근본적으로 다시 식물을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인 전분화능이 있다고 한다. 이미 일정한 형태나 기능을 가지고 있는 세포나 조직이 내적 혹은 외적 조건의 변화로 다른 형태나 기능으로 변화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지극히 원초적인 소통만으로 완벽한 분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도 크리스마스 선인장처럼 겨울에 피는 꽃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꽃을 피우는 계절을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내고, 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비아냥을 견디고 꽃을 기대할 수 없던 시절에도 피고 지던 자줏빛 꽃 하나 있었노라고 기억되고 싶다. 사람에게도 웃자라는 감정이 있는 것 같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출렁거리는 슬픔은 대책 없이 웃자라기도 한다. 뭉텅뭉텅 꺾어서 꽂아두었으면 좋겠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에 자줏빛 꽃망울을 터트리기 위해 지금은 꼭꼭 싸매 놓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선인장은 비밀 하나를 가지고 있다. 봄이 오는 길목의 베란다에서 꽃샘추위를 견디게 하면 4월에도 거짓말처럼 자줏빛 꽃을 피운다. 부활절 선인장이 되는 순간이다. 적당한 온도와 일조량의 조절로 꽃을 속인 것이다. 사노라면 적당하게 속아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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