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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Mar 27. 2019

아네모네, 슬픈 신화의 바람이 분다

나는 누군가에게 아네모네로 살았던 적이 있었던가.

 어떤 날은 일부러 거꾸로 돈다. 나는 대부분 오른쪽을 선택하는 것이 익숙하다. 버스를 타거나 스카이트레인을 타서 자리에 앉을 때도 무의식적으로 오른편을 선택한다.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은 나와 방향이 다른 사람들이다. 나아갈 방향이 같은 사람들은 자주 마주칠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반대 방향으로 돌면 지금까지 보았던 풍경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바뀐다. 매일 같은 길을 걷는 나에게 주는 파격이다. 단조로울 수 있는 내 삶의 영역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마주치는 사람들도 바뀐다. 내가 지나쳤거나 나를 지나쳤을 사람들의 뒷모습이 아니라,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다른 각도로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너머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진실이 숨어있기도 한다. 때로는 마음이 어쩌지 못하는 것이 있다. 아무도 줄 수 없는 답을 마음 너머로 툭 던져놓는다. 우리는 모두 숨은 사정 하나쯤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그녀는 무함마드 알리의 말을 인용했다. 세 번이나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했던 권투선수, 뛰어난 운동신경과 상대를 자극하고 대중을 열광하게 만드는 언변을 소유했던 남자.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베트남 전쟁 참전을 거부하고 스스로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당했던 남자. 집안일을 하다 보면 늘 한 군데는 깨져서 피가 나거나 멍이 들어야 하는 나에게 그녀는 조심성이 없어서 그렇고, 아들들이 아빠를 닮아서 운동신경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마음을 담으란다. 마음을 써야 할 때는 신속하고 정확해야 한다. 느려야 할 때는 느리고, 빨라야 할 때는 빨라야 한다. 낄 때 끼고 빠져야 할 때 빠져야 한다. 그녀가 나를 꼼짝달싹 못하도록 길들이고 있다. 살다 보면 때로는 다른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욕망의 교차점에서조차 내가 원하지 않은 길을 걸어야 될 때가 있다. 오늘도 나의 예측은 빗나갔다. 누군가의 동행이 되어야 할 때가 있다. 그녀는 갑자기 꽃이 보고 싶다고 했다. 


 때 이른 화원, Port Kells Nurseries Garden Centre를 찾았다. 온실에서 일찍 꽃을 피운  봄꽃, 나무들, 화분들 그리고 정원을 꾸밀 수 있는 장식품들을 살 수 있는 곳이다. 화원을 둘러보다 보니 봄이 서둘러서 올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겨울옷을 벗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녀는 꽃을 보자마자 양귀비꽃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닮았을 것이다. 여리지만 단아했고, 궁색한 표현이지만 예쁘고 슬프게 느껴졌다. 아네모네 Anemone, 그녀는 꽃을 보았고 나는 꽃을 읽었다. 교만을 떨지 않으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꽃이다.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이고 적당한 햇볕과 통풍이 어우러진 곳에서 자란다. 봄바람에 피고 봄바람에 지는 바람꽃이다. 


 꽃의 신 플로라와 바람의 신 제피로스에게는 아네모네라는 아름다운 시녀가 있었다. 바람의 신이 아네모네의 아름다움에 빠지고, 꽃의 신은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아네모네를 멀리 쫓아버린다. 바람의 신 제피로스는 바람을 타고 그녀를 찾아내어, 둘은 깊고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꽃의 신 플로라의 질투는 아네모네를 꽃으로 만들어 버렸다. 봄이 되면, 바람의 신은 따뜻한 바람을 보내어 아네모네를 흔들어 깨운다고 한다. 봄바람이 분다. 나를 흔들어 깨우는 슬픈 신화의 바람이 분다. 우리는 모두 아네모네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에게 아네모네로 살았던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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