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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Apr 03. 2019

순백의 목련에 갇히다

살짝 벌어지기 시작한 여섯 장의 꽃잎, 그 원초적인 사연.


 적당한 온도와 햇빛에 꽃을 피웠다고 보기에는 그 신세가 너무 애처롭다. 길었던 겨울도, 온종일 흔들기만 하는 차들의 속도도, 그리고 무심하게 지나치는 인생들도 모두 견디고 있다. 그런데 숨이 멎을 것처럼 꼿꼿하다. 공원으로 가는 도로 한복판에는 외딴섬이 있다. 차들이 서로 넘나들지 못하도록 경계를 구분한 것이다. 차가 다닐 수 없고 사람들도 걷지 않는 그곳에 목련 나무 세 그루가 줄지어 서 있다. 자칫하면 이도 저도 아닐 수 있는 그곳에 가로수로 심긴 것이다. 메마른 나뭇가지에 시리도록 하얗게 매달린 연꽃. 끝내 봄볕을 등지고 서 있는 꽃봉오리. 굳게 다문 입술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왠지 나만이라도 차를 세워야만 할 것만 같다. 살짝 벌어지기 시작한 여섯 장의 꽃잎, 그 원초적인 사연을 들어주어야 할 것 같다.


 도로 옆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목련을 본다. 더 짙은 하늘에 걸리기 위해 순백의 목련은 햇빛을 등지고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의 봄은 며칠째 중앙분리대에 갇혀있다. 차들은 아랑곳없이 그들만의 속도로 1번 하이웨이로 진입하거나 이제 막 빠져나오고 있다. 시끄럽다고 확 내지르고 싶다. 그러다가도 목련의 색깔 때문이었을까.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 것만 같다.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백색소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이에서 맴돌던 날들과 맴맴 돌던 말들. 내가 옆에 있으므로 해서 마음을 놓을 수 있었기를 기도한다. 나를 백색소음으로 삼아 밥을 짓거나, 빨래를 널거나, 여자들의 한가로운 수다에 낄 수 있었기를.


 소리에도 색깔이 있기나 하는 것일까. 백색소음은 처음에는 그저 시끄럽다. 그런데 그 시끄러운 소리가 한데 합쳐지고 주변의 다른 소리를 덮고 일정한 리듬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금세 마음이 차분해진다. 긴장을 완화하고 집중력을 높여준다.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에 수면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졌다. 아이들은 엄마의 청소기 소리에 울음을 멈추거나 깊은 잠에 빠진다. 소리가 만들어내는 색깔이 아마도 무지개처럼 달콤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진공청소기 등 가전제품에서 나오는 잡음도 그렇고 파도 소리, 바람 소리, 빗소리, 폭포나 시냇물 소리, 새소리, 나뭇가지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 등이 자연이 만들어준 백색소음이다.


 우리는 모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없이 많은 말과 수없이 많은 일이 맴도는 그곳에서 무엇 하나쯤 백색소음으로 삼아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백가지 문제가 있다 해도 어쩌면 나에게는 한 가지 답만 필요할지도 모른다. 천 가지 소리를 덮는 한 가지 소음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4,265번째 걸음이 마치는 구간은 1번 하이웨이 옆을 걷게 된다. 하염없이 동쪽으로 이어진 도로답게 차들은 저마다의 무게와 속도로 굉음을 만들어낸다. 차가 없는 곳을 걷기 위해 차를 타고 와서, 차들이 만든 소리의 굴절과 저항 속을 걷고 있다. 더 이상한 것은 분명 시끄러운데 점점 조용해진다는 것이다. 8,030km,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캐나다를 횡단하는 1번 하이웨이의 거리이다. 그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고 싶은지도 모른다. 걸으면서 잡다한 생각들을 하나씩 꺼 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꽃잎이 더 짙어지는 것을 보면 오늘 밤에는 비가 올 것 같다. 툭툭, 나의 봄은 빗소리에 갇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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