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군가에게 닳아 없어질 것처럼 뜨거웠고 찬란했던 적이 있었던가.
걷다 보면 사람들의 눈을 마주쳐야 할 때가 있다. 가벼운 눈 맞춤이 전부인 나의 인사는 환하게 잇몸을 보이며 손을 흔드는 그녀를 멋쩍게 지나치고 만다. 못내 아쉽기만 하다. 나의 겉과 속은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사소한 것에 마음 다치지 않고, 나만 편하면 된다는 그런 류의 천박함이 아니라고, 영어 발음이 좋지 않은 무뚝뚝한 남자의 마음으로 하는 인사는 따로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오늘, 당신의 하늘은 어떤가요?”
빨리 걷는 오르막길에서는 눈을 마주치는 것도 어정쩡하다. 내리막길에서는 다리에 힘을 주고 조금 천천히 걷는다. 혹시라도 무릎에 무리가 될 수도 있다는 기우일 것이다. 나만의 속도를 조절하는 중년의 품격이다. 오르막길에서는 의도적으로 더 깊은 호흡을 하려고 노력한다. 땀이 맺히고 숨이 차오르면 나의 본능은 끊임없이 나를 회유한다. 천천히 좀 걷자고, 오늘 하루만 걷다가 말 것처럼 그러지 말라고, 나이도 생각하라는 아내의 잔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만 같다. 다리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굳게 다잡고 있던 마음의 소리가 풀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짝 봄비라도 뿌려지는 날에 창밖을 보며 마시는 커피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괜스레 운동화 밑바닥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내 운동화는 거의 일 년에 한 번씩 새 것으로 바뀐다. 이대로 가다가는 올해도 소나기 쏟아지는 어느 여름날에는 닳아 없어진 고무의 두께만큼 운동화 안쪽까지 비에 젖을 것 같다. 올해도 어김없이 내 생일 선물은 운동화가 될 것 같다. 그러면 난 바닥이 닳아서 구멍 난 내 신발을 토닥거릴 것이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더 오래 신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닳아서 없어지는 것들이 있다. 한낮의 햇볕에 바짝 마른 이불을 털어서 방안에 펼치면 집은 온통 잘 마른 빨래 냄새로 가득해진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겨울 이불은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오셨던 혼수였다. 목화솜을 틀어서 만든 두껍고 무거운 솜이불이다. 유난히도 외풍이 심했던 우리 집에서 겨우내 우리 가족을 덮어 주었던 그 이불은 어머니의 든든한 동지였는지도 모른다. 말린 이불을 고르게 펴고 윗면은 초록색 바탕에 학이 수놓아져 있고, 밑면은 부드럽고 하얗던 겉감을 서로 꿰매어야만 완성된다.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어머니의 바느질은 찢어지고 헤진 것들을 다독거렸을 것이다. 닳아빠진 골무를 손가락에 끼고 자신의 신세를 바늘 끝에 달아서 이불 사이에 찔러 넣고, 누비고, 기워서 가족들을 얼기설기 붙여놓았는지도 모른다. 낮에도 그 이불이 펼쳐진 곳은 온기가 남아있는 아랫목이 된다. 그 솜이불을 덮고 우리는 겨울을 났다. 지금은 그 이불도, 그 골무도, 어머니의 무릎도 세월 속에서 닳아서 사라져 버렸다. 봄바람 결에 스치듯 아릿한 이불 냄새가 나는 걸 보면 닳아서 없어지는 것들은 어머니의 한숨처럼 우리를 중독 시키는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그리움이 차오르는 것들이 있다. 살다 보면 너무 정이 들어버리는 것들이 있다.
나의 봄은 들꽃에게로 간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야만 보이는, 눈물 나도록 작은 세상. 길가에 깔린 나만의 레드카펫이다. 마치 나의 입장과 퇴장을 맞추기라도 한 듯 피어오른 수줍음이다. 그 위에 입을 맞추듯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나만의 예식, 수없이 흔들리는 흐릿한 초점을 맞추는 동안 나도 꽃송이만큼 덩달아 흔들렸을 것이다. 지나치던 사람들이 궁금한 듯 말을 걸어온다.
“무슨 꽃인가요?”
“글쎄요.”
나에게는 누군가에게 불렸을 그 이름이 필요치 않다. 작고 하얀 꽃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예쁠 이름을 짓는다. 단 한 번의 봄을 뜨겁게 피고 찬란하게 질 이름 모를 꽃들을 위하여.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이 단 한 번의 봄을 누군가에게 닳아 없어질 것처럼 뜨거웠고 찬란했던 적이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