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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Apr 05. 2019

그래, 그냥 살아보자

봄비 내리는 날에,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에 대하여

 봄비. 툭툭,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때를 따라 비를 내리는 신의 계산법에 대하여 봄은 여자의 촉처럼 선명하고 꼿꼿하다. 수줍음도 잠시였고, 싱그러움도 잠시였다. 미련도 주저함도 잠깐일 것이다. 꽃잎을 떨구어야 할 때와 아기의 손톱 같은 봄 잎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나무껍질을 긁던 소리와 단 한 번뿐인 봄을 비집고 내민 풀잎의 수줍은 민낯을 어떻게 마주쳐야 할지를 안다는 말이다. 다시 꽃잎을 피웠거나 처음 봄 잎을 피웠거나 마지막으로 풀잎을 피웠거나, 어쩌면 부끄러움은 봄의 몫일지도 모른다. 꽃잎과 봄 잎과 그리고 풀잎에 물든 나의 봄은 온통 생긋하다.


 “우리 엄마는 내 나이에 총명이 하늘을 찔렀어.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한지 몰라.”


우리는 커피 한 잔을 놓고 창밖을 볼 수 있도록 나란히 앉았다. 자줏빛 목련이 꽃을 피우고 있다. 전혀 생긋하지 않은 대화가 시작되었다. 자신은 엄마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살다 보니 점점 엄마를 닮는 자신이 너무 신기하단다. 아내는 또 인터넷에서 치매 초기 증상에 대해 찾을 것이다. 깜빡깜빡, 엄마를 닮지 않은 건망증에 대한 자가 진단이 필요하다.


 “나도 젊었을 때는”


이 말처럼 부끄러움도 모르고 속내를 다 꺼내놓는 말이 또 있을까. 젊어 보인다는 말처럼 속내를 그럴듯하게 감춘 말이 또 있을까. 그건 내가 올드하고 엔틱하다는 말이다. 전에는 필요 없던 것들을 자꾸만 챙기게 된다. 보약처럼 입안에 털어 넣어야 할 것들이 생겼다. 봄을 타는 나이가 있기는 한 걸까. 올해는 더 유난을 떨 듯 봄을 탄다.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 번씩 아내가 나를 쿡쿡 찌르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지금 내 나이에 첫 손주를 보셨대.”

 “당신 나이에 할머니 소리를 들었다는 말이네.”


 “우리 아들들이 결혼하려면 적어도 10년은 더 있어야 하는데.”

 “그럼, 당신은 지금부터 10년을 되돌려서 살아도 되겠네.”


 아내는 무심코 자신의 나이를 가늠한 것인데, 나는 손바닥 뒤집듯 시간을 뒤집어 버렸다. 10년 후에 있을지도 모를 일을 모의하고 당장 오늘부터 10년을 뺀 나이로 살자고 했다. 아버지와 나는 각자 다른 방식의 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의 중년과 나의 중년도 다르다. 그리고 나는 정작 그의 노년을 보지 못했다. 

갑자기 우리의 대화가 염치없게 느껴졌다. 비가 오는 날에는 꽃잎이 더 붉게 보인다. 빗소리가 커지는 만큼 주변은 고요하다. 눈이 부시게 빛나는 날에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들이 비가 오는 날에는 더 선명하게 보이고 들린다. 

10년 전에, 오늘처럼 봄비가 내리는 날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누구와 있었을까. 10년 전 나이의 감각으로 살 수 있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나는 부끄러운 욕심을 계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녘에 날개를 편다.’


 봄비가 잦아들던 어느 늦은 오후였다. 길을 걷다가 부엉이를 보았다. 낯선 존재감이 신기하다. 이끼 낀 나뭇가지에 앉아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기에 모두가 잠든 밤에 움직인다는 부엉이. 어쩌면 나의 부끄러움을 읽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혜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안다는 말일 것이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 것. 그리고 침묵할 수 있다는 것. 지혜는 밤의 역사를 안다는 말일 것이다. 아직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살다 보면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알 것 같은 일들이 있다. 그때는 알았는데 지금은 모르겠는 일들이 있다. 나도 나를 모르겠다.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 그냥 살아보자. 세월이 더 흐른 후에, 오늘은 몰랐던 것들과 오늘은 그냥 묻어두어야 했던 것들에 대한 이유를 묻자. 일단 희망을 접지 말고 살아보자. 다만 부끄러움에 무뎌지지 않기를. 다만 부끄러움을 가르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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