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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Apr 09. 2019

고맙다 후디

후디가 나를 헐렁하게 끌어안아주었다.

이렇게 젖어볼 수 있는 날들이 점점 적어진다.


 금방 비가 올 것 같았지만 걷기로 했다. 회색 후디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나섰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지금도 애장하고 있다. 색깔이 바랬거나 낡은 곳이 별로 없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뛰지만 나는 더 느리게 걷는다. 비에 흠뻑 젖는 느낌이 싫지 않다. 이렇게 젖어볼 수 있는 날들이 점점 적어지고 있다.



물에 빠져 죽는다는 점괘 때문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수영을 했었다. 한 번도 물가에 맘 놓고 가본 적이 없는 내가 수영이라니. 어렸을 때 나는 항상 몸에 부적을 지니고 살았다. 어머니는 내가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주머니에 부적을 넣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꿰매곤 하셨다. 물에 빠져 죽는다는 점괘 때문이었다. 잠을 잘 때는 베개가 부적의 자리였다. 이미 3번 물에 빠져서 죽을 뻔한 경험을 했다. 강을 건너다가 물살에 휩쓸려서 두 번, 발이 닿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한 번. 물론 수영을 배워본 적도 없었다. 숨을 참을 수 없을 때까지만 물에 떠 있을 수 있다. 다음은 맥주병처럼 가라앉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수영의 전부였다.

그런 나에게 수영은 운명을 거스를 만큼의 절박함이었다. 조금 느리게 살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이었다. 음식을 먹으면 체하는 경우가 잦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몸도 마음도 쉽게 추스르기 어려웠다. 당연히 행복할 수 없었다. 먼저 일을 줄이고 오기로 시작한 것이 수영이었다. 거의 매일 2시간을 나에게 선물했다. 수영장 물을 배가 부르도록 많이 마셨다.

밴쿠버에 도착해서 수영장 대신 숲을 선택했다. 샤워하고 난 뒤에도 코끝에서 사라지지 않는 수영장의 약품 냄새 대신 나무 냄새를 선택했다.



반짝거리던 햇빛 한 조각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처음 밴쿠버에 도착했던 그해 겨울, 41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가 왔다. 모든 것이 낯설고 사소한 것 하나에도 의미를 크게 부여했던 때라 비교적 기억이 정확하다. 부슬비가 소리도 없이 온종일 내리는 날도 있다. “빡 돌아버리겠어요.” 누군가가 적절하게 토해놓았던 그때의 심정이다. 표현이 친숙해서인지 지금도 웃음이 난다. 비가 그치고 햇빛까지 비치던 그날, 반짝거리던 햇빛 한 조각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제는 살았구나 싶었다. 밴쿠버의 겨울은 비가 많이 온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모르게 꼰대처럼 다리를 꼬고 앉게 된다. 그때는 더했다고,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해 겨울의 무용담이 입에서 맴돈다.

모자가 달린 옷을 하나 샀다. 후디(hoodie), 북미 사람들이 사랑하는 스트리트웨어이다. 모자가 붙어있고 배에 주머니가 있다. 두꺼운 재질이고 헐렁해서 물려 입기에 적합하다. 자신이 다니고 있거나 좋아하는 학교나 모임 혹은 스포츠팀의 로고나 이름이 새겨진 후디를 입고 소속감이나 애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무리 밴쿠버의 겨울일지라도, 비가 쉬지 않고 오는 것은 아니다.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 잠깐 멈추는 시간이 있다. 무조건 회색 후디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특별히 시간이 정해진 일들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무렇게나 걸치기에 충분할 만큼 헐렁하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모든 것이 낯선 그 도시를 배회했다. 세월이 흘렀고 아이들은 벌써 대학생이 되었다. 좋은 대학에 진학했고 비교적 잘하고 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는 후디가 필요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 하나 없던 미지의 세계. 그 단호하기만 했던 시간을 그나마 후디가 나를 헐렁하게 안아주었다. 나는 지금도 후디가 고맙다.



주인을 찾습니다.


 이틀을 망설였다. 색깔 때문이었을까. 길가에 떨어져 있는 빨간 덮개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앙증맞다. 생김새로 보아 우산이나 양산의 덮개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작은 크기 때문에 더 마음에 걸렸다. 더군다나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서 세우고 덮개를 사람들의 눈에 띄도록 걸었다. 한 송이 빨간 꽃이 피었다. 주인을 찾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소중했을 수도 있는 마음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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