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 속에 살지 않는 나만의 방식이 필요하다.
매일 걷는 길에 초원이 있다. 탁 트인 풍경 위에 그림 같은 집이 있다. 양철지붕 헛간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까.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이 흘렀어도 변한 것이 없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 잘 어울린다는 말일 것이다. 하늘과 초원과 집, 나는 매일 충동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거리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마음에 닿을 수 있는 적당한 거리에서 숨죽이며 너와 나 사이의 온도를 조절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완벽한 피사체가 아니다.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세상, 전부를 빼고 나는 너만을, 너는 나만을 들여다보게 하는 풍경이 있다. 언젠가 다시 한번 읽어보기 위해 꽂아 두었던 책갈피처럼 마음에 머물러 있는 풍경이 있다. 시간을 거슬러 갈 수는 없지만, 공간을 거슬러 갈 수는 있다.
걷기는 나의 삶이다. 매일 같은 길을 걷는다. 혼자 걷는다는 것은 필연처럼 나에게 주어진 나의 길에 대한 나의 당연한 응답이다. 나의 걷기는 나에게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가르친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며 살기 위해 때로는 절대 고독이 필요하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 속에 살지 않는 나만의 방식이 필요하다. 옷을 갈아입고 신발을 신으면서 훌훌 나를 벗는다. 몸이 흠뻑 젖는 만큼 빠르게 걷다 보면 말랑거리는 것들과 단단해지는 것들이 있다.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나의 길,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걸을 수 없을 나의 길을 걷는다.
풍경은 나의 생각이다. 나의 삶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생각한다. 걸으면서 처음으로 봄의 색깔을 고민했다. 민들레의 풍경을 보면서 아릿한 상처를 떠올렸다. 달팽이, 그토록 느린 풍경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무심코 밟고 지나쳤을 끔찍한 순간들에 대해 나는 절망한다. 걷다 보면 조금씩 보이는 것들이 있다. 어제는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린다. 세상이 한없이 느려진다. 내가 놓치고 살았던 것들에 대해 나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무엇을 가졌고,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묻는다. 오늘도 충동적으로 사진을 찍는 이유이다.
하늘은 나의 신앙이다. 나와 우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구름 너머의 하늘은 여전히 파랗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비가 내리면 그 비에 젖는다. 바람 부는 날에,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나의 뺨을 어루만지는 소리가 있다. 단 한 번도 하늘만 찍힌 적이 없다. 자세히 보면 새가 지나가고, 이파리가 걸렸고, 구름 한 점이 있다. 때로는 바람이라도 지나간 흔적이 남는다. 기꺼이 소중한 것들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 되어준다. 내 손을 잡아끄는 자리에 가만히 무릎을 꿇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하늘을 보듯 세상을 보게 된다.
나에게 허락하신 나의 삶과 나의 생각과 그리고 나의 신앙. 나의 삶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때로는 폭풍우 휘몰아치는 길을 치열하게 걸어야 하고, 때로는 폭풍전야처럼 고요하다. 절대 고독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면, 듣는 만큼 나는 또 흔들려야 한다. 가장 단순하게 눈멀고 귀가 먼 것처럼 살아야 할 때가 있다. 더 이상 상처 받고 아파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갈등할 시간도, 방황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만 할 수 있는, 나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나의 오직, 나의 유일성을 질문한다. 얼마만큼 흔들려야 견고해질 수 있는 것일까, 그 어떤 위협에도 지지 않고 소중한 것들을 지켜낼 수 있을까. 거친 호흡을 추스르고 광야로부터 오는 소리를 듣는다. 꽃잎이 흩날리는 길을 한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