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에서 밭 매다 왔느냐는 말. 가부키 화장했느냐는 말.
날씨 예보를 자주 보게 된다. 시간별로 날씨를 보기도 한다. 내일 봄비가 내리고 모레부터 기온이 섭씨 20도 정도로 올라간다는 예보다. 벌써 밴쿠버의 여름이 설렌다. 나에게 밴쿠버의 여름은 아마도 천당 밑에 999당쯤 될 것 같다. 사랑스럽다. 여름이면 해가 질 때까지 밖에서 배회하고 싶어서 나가게 된다.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으면 파란 하늘이 얼마나 잠이 오는 색깔인지 알게 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차에 태워서 들로 산으로 바다로 호수로 다녔었다. 풀밭 위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10시쯤 어둑해지면 집으로 돌아온다. 매일 소풍을 간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은 걸을 수 있어서 좋다. 햇볕이 좋은 날은 커피 한 잔 들고 어디라도 나가고 싶어 진다. 걷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순간부터 마음마저 들뜬다. 거울을 보면 한 사내가 웃고 있다. 이토록 사소한 일에도 행복을 느끼는 느끼한 남자가 있다. 나는 느끼한 남자다. 햇볕이 뜨거운 날은 선크림을 바르고 나간다. 얼굴에 이물질이 묻은 것만 같아서 지금도 불편하다. 지성 피부이기 때문에 오후가 되면 눈이 따가울 정도로 개기름이 좔좔 흐른다. 화장품을 바르면 더 번들거리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살았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서 그렇단다. 한 번도 피부에 신경 써본 적이 없다. 사내아이들이 여드름 치료를 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못마땅해서 혼자 고개를 젓고는 했다. 냄새도 너무 진하다. 스킨이 피부에 닿을 때 톡 쏘는 따가운 느낌도 싫다.
어느 여름이었던가. 한국에서 오랜만에 만난 분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 그들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살다가 왔고 나는 북미 캐나다에서 살다가 만났다. 애들 얘기, 날씨 얘기, 이런저런 사는 얘기들을 나누었다. 아프리카는 당연히 뜨겁고 살기 어려울 것이라는 나의 편견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가 아프리카에서 살다가 왔어? 왜 그렇게 탔어.”
갑자기 뒤통수라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원래 피부가 까무잡잡하기는 하다. 그래도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밴쿠버에서 밭 매다 왔느냐는 말에, 결국 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매일 밴쿠버의 햇볕을 즐긴 대가 치고는 조금 가혹하기는 했다.
돌아오는 길에 당장 공항에서 선크림을 샀다. 햇볕이 뜨겁던 날, 얼굴에 잔뜩 바르고 몇 번을 문질러도 스며들지 않는다. 조금 낯설기는 했지만 원래 다 그런 줄로 생각했다. 당연히 선크림을 바른 거려니 넘어갈 줄 알았다.
“가부키 화장하셨어요?”
가부키, 일본의 전통 연극이다. '노래(歌)'와 '춤(舞)'과 '솜씨(伎)'를 뜻한다. 호화로운 무대와 의상이 특징이고, 배우들의 독특한 화장 방법으로 유명하다. 200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무튼 너무 많이 바르면 안 된다는 것을 몰랐다. 그녀는 처음, 나에게 맞는 화장품을 고민하게 했다. 나에게 맞는 화장품이 있다. 특별한 향이 없다. 무엇보다 로션을 발랐는데도 기름기가 없어 보인다. 전문용어로 아주 매트하다. 심하게 따갑지도 않다. 피부 자극이 없다는 말이다. 내 얼굴은 매일 상처를 입는다. 면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은 괜히 기분이 좋다. 아이들과 캠핑을 가면 3일 내내 면도를 하지 않고 산다. 요즘도 선크림을 얼굴에 바르다 보면 실실 웃음이 난다. 오래 마음에 남는 말이 있다. 그 말을 누가 했는가도 중요하다. 나에게 맞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