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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Mar 31. 2022

그렇지, 나 잘한다





의사가 별말 하진 않는다.

"잘하고 있어~"

"많이 좋아졌네!"

반말로 응원을 받는 기분은,




묘하게 좋다. 항우울제와 신경 안정제를 먹기 시작한 지 이제 막 1년이 되어 간다. 그 안에 투약량이 반으로 줄었다. 개수뿐 아니라 횟수가 준 것도 우리 집에 사는 한 목사는 가히 고무적이라 여긴다. 의료계에 종사하는 친척 동생이 나를 염려하며 묻다가 투약량을 듣고는 "언니. 간의 기별도 안 가겠다." 했던 말도 생각나고, 뒤에 "그래도 먹지 않는 게 좋겠어. 가족이라 하는 말이야." 또한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럼에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다. 몸과 마음이 잘못 얽히고설켰을 때, '불가항력적' 사전적 정의에 딱 맞게 몸과 마음이 자연재해를 입은 것 같을 때 그렇다. 각종 문(door)을 여닫기에 몸이 버겁고, 일상적 헤어짐에도 눈물이 철철 넘칠 때 그렇다. 할 수 있는 한 해봤던 모든 검사가 대부분 정상인데, 밤새 온몸이 타는 듯하여 고통스럽고 잠을 이룰 수 없을 때 그렇다. 그때의 내 전신은 사랑을 못할 바에 불타버리는 그런 영화 주인공 같았..




약발은 최고다. 의사는  정도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자꾸 그렇게 믿는다. 성도가 약까지 먹어가며 건강을 구하는데 약발이 들지 않을 리가. 가령 자기 전에만 약을 먹기 때문에(느낀 ), 취침  의욕에 불탄다. 침대에 누워 온갖 행복한 상상과 기분 좋은 만남을 그리느라 잠을 설친다. 잠을 자라고 먹은 약인데, 기부니가 좋아져 그만 잠에서 깨는 거다. 아주 내가 또랑또랑 해버려, 통증 때문에   없던 집안일, 내일 빨래-설거지-청소의 순서를 신나게 계획한다. 연락해야  사람들을 떠올리며 공유할 주제도 생각한다. 더불어  주제도 뇌리에 솟구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다. 휴대폰 메모장에  바가지 적고 눕기를 세네  반복하다가 잠이 든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느낀 ) 약발이 끝났으므로. 모든 의욕이 오리무중 온데간데없다. 만나려 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면 갑자기 부끄럽고, 아침이나  차려 먹고, 그냥 오늘  일을 한다. 그리고 비로소 이런 내가 좋다고 여긴다. 사람에겐 너무 들뜨지도, 실망하지도 않는 일상이 중요하니까.




대체 고통에 끝이 있을까 버릇처럼 말하던 내가 어느 날 끝날 수도 있겠다 믿었다. 고통이 이어지고 다른 고통이 와도 그때 발할 맷집을 기대하기도 한다. 몸의 가동성이 밀리미터 눈금 한 칸씩 늘어날 때마다 물개 박수를 치고, 실컷 울었다가 세수를 하고 빼꼼히 열린 문을 웃으며 나온다. 지인들에게 충격적인 몰골로 나서야 했던 때를 떠올리면 그 무슨 당당함이었나 싶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갔던 그 시절의 나를 칭찬한다. 하얀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 지면 위에서 열등감에 두렵다가도, 나에 대해 낱낱이 고백하던 글쓰기가 결국 좋은 처방이었다 생각하니 그간 짜낸 에너지가 아깝지 않다.




건널목 건너기도 절절매던 몸이 어느 날 언덕 좀 올라볼까 객기를 부렸다. 언덕을 돌고 집에 돌아오며 좋기도, 짠하기도 하여 목구멍이 뜨끈했다. 아픈 이래 대중교통을 처음 이용해 출근했을 때는 세상의 모든 출근은 내가 다하고 싶어졌다. 갑자기 온갖 공부를 시작했다. 점수가 하도 낮아 "너 나 싫어하냐" 하시던 한자 쌤 떠올리며 매일 한 글자씩 공부하고 히라가나도 외운다. 재활 운동 가기 전날 밤엔 가슴이 쿵쿵대서 문제고, 역병 염려하며 수업 미룰까 묻는 쌤의 연락에 괜찮다고 문 앞에서 기다린다. 여전히 굽지 않는 엿가락 같은 몸이면서 "그렇지! 잘한다!"는 격려에 운동하다 탄력 지대로 받는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말이 귓가에 청아하게 울린다.




나의 하루는 이런 의미다. 그냥 얻지 못했고, 오래 앓고 연민하며 얻었다. 주변의 회복 촉구와 왜인지 그에 잘 협응하지 못하던 내 몸의 콜라보다. 아파서 찾아간 친정에서 들은, "너 아프냐, 짜증난다"는 부친의 소회 덕분에 보란듯이 특별했다. 그 결과 누군가 고통스런 사람에게 할 말 있느냐 묻는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건강한 관조는 어렵다는 것. 자신에게 연민 하나는 꼭 보장해주라고 말하고 싶다.




“이제 괜찮지?” 하는 물음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아니요”라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것 같다. “아직도 아프다고 말하지 마, 제발” 하는 눈빛이 읽히니까. 누군가 “어떤 식으로 아픈 거야?” 물어 오기에 통증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고민하는 사이 대화 주제가 바뀌기도 했다. 나는 그때, 아픈 이들이 내뱉는 "괜찮아. 많이 좋아졌어요."라는 말과 웃음 사이는, 채 마르지 않은 열등함에 푹 적셔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행간을 알면 누구도 쉬이 회복을 촉구할 수 없을 텐데. 건강한 게 정상이라고 외치는 세상에서 아픈 자가 지내는 하루는 연민 덩어리어도 되지 않을까.




그나저나 큰일이네. 자기연민을 거두고자 시작한 글이 철저히 지난 자기연민에 기대고 있으니 좀 부끄럽다. 그런데 나는 아직 할 말이 많다.




이미 종종 써온 주제예요.

글쓰기 모임에 필요해 다시 써본 글이고

같은 주제, 많이 회복된 관점에서 써봅니다.

제 소중한 (소수의 ㅎㅎ) 구독자 분들은

이미 아는 이야기라 메시지 남깁니다.

또, 거듭,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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