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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May 25. 2022

약 먹었어요




우울의 척도는 내일에 대한 의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아파서 밥을 차리고 먹는 것도 버겁고, 당연히 설거지는 못하겠고, 몸도 겨우 씻고, 머리도 간신히 말린 후에 침대에 누웠는데 등은 또 왜 그렇게 아픈지. 겨우 잠이 들었는데 매일 새벽 네 시쯤, 누가 등을 바늘로 찌르듯이 아파 깰 때면 정말이지 사는 게 지긋지긋해서. 내일은 왜 오는지, 아침은 진짜 또 오는지,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고. 우울증이 보내는 다양한 신호 중에 내일을 반기지 않는 증세가 가장 흔하지 않을까.




약이 잘 듣고, 다시 잘 자고, 몸의 통증들은 하나 둘 인사도 없이 떠나간다. 통증 교우들과 헤어지고 혼자 남는 기분은 생각보다 묘하다. 스위치를 누르지도 않았는데 날뛰던 신경들이 이젠 몇 가닥 빼고는 조용한 게 은근 무섭다. 후련한 건 둘째 치고, 혹시나 은근슬쩍 또 오실까 불안하다. ‘손절’이라는 도장을 쾅 찍고 싶은데 그런 게 없으니까 살짝 따가우면 여전히 문제인가 싶어 의심한다.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듯, 이런 나를 멍하니 보다가, ‘그만 읽자. 몸 상태 좀 그만 읽고 하늘에 맡겨보자’ 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읽을거리가 적어지니 몸 밖의 일에 관심을 두고, 몸과 마음의 가동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둘 찾게 됐다.




그중에 제법 삶이 환기되는 일, 몸 쓰는 법을 잊은 내게 딱 어울리는 일, 나를 백지로 여기고 무수한 가능성으로 채우는 일이 있다. 부모 손잡고 돌상 앞을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아기처럼 새로운 일상에 나를 맡겨 보는 습관. 내겐 외국어 공부가 그렇다.




히라가나를 외우기 시작했다. 고교시절 그렇-게 일본 드라마랑 만화를 찾아 봤는데, 일본어 앞에선 까막눈이다. 영어는 30년째 족히 보는 중이고 중국어와 프랑스어도 해봤지만, 내게 지금 필요한 건 일전에 전혀 간 보지 않은 생판 모르는 언어였다. 친정엄마가 3년째 히라가나를 못 외웠다는 말에 살짝 겁이 났으나 상대적으로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소인, 어머니껜 죄송하오나 어머니보단 아직 어려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일본어의 ‘가나다라’, 아니 ‘기역니은디귿’도 모르니 일단 히라가나 오십음도부터 외우기로 했다. 한 달 정도 무료 영상을 보며 그림으로 외웠다. 어릴 때야 언어에 자주 노출만 되면 자연스레 외워진다지만 30대 중반은 달랐다. 아까 먹은 음식도 생각이 안 나는 중에 글자를 외우려니 진도가 안 나갔다. 어떻게든 발음이 떠오르도록 글자와 비슷한 모양을 상기해야 했다. 에어로빅 자세 중 쩍벌 자세를 연상시키는 ‘에え’, 망친 계란 프(후)라이를 연상케 하는 ‘후ふ’를 공책에 그리고, 외우고, 발음하는 과정을 거쳐 드디어, 간단한 단어를 읽을 때의 희열이란! 이걸 기쁘다고 해야 하나 웃기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스스로에게 박수를 치는 이 마음은, 태어나 처음으로 히라가나를 외운 나만의 것이리라.




나는 엄연히 살아남은 자였다. 그림으로 배우는 히라가나 수업 1강 조회수는 현재 380만, 2강은 144만, 3강은 100만, 가타카나 강의는 70만 회다! 아, 내가 70만 명에 들어왔구나.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는 사실만으로도 계속할 동기부여는 충분했다. 물론, 가타카나를 외울 때 위기가 왔다. 이것까지 외워야 하나? 그러다 SNS에 들어가 일본인 게시물을 살펴보고, 잔말 말고 외우기로 했다. 가타카나는 주로 영어 표현, 고유 명사에 활용되는데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영어가 곧 일상 언어에 가까웠기 때문에 피할 수 없었다. 다 똑같이 생긴 것 같아 헷갈리는 중에도 영단어를 알면 정황상 가타카나는 잘 읽히는 편이다. 예를 들면, 예쁜 케이크 아래 적힌 단어면, 글자 중 ‘키’ 하나만 알아도, ‘케-키ケーキ’라 읽을 수 있었다.




이로써 나는 30대 중반을 넘기며 인생 처음으로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뗐다. 가타카나의 마지막 획을 적고 노트를 접은 날부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궁무진했다. 일본 드라마를 알아듣고, 만화책을 읽고, 새로 산 한자 공책을 쓰고, 여행 가서 한 마디라도 말하려면 더 살아야지, 죽긴 왜 죽어. 마음은 성큼성큼 일본 열도에 도착했고, 현실은 새로 신청한 강의 제목처럼 ‘아장아장 기초 일본어’ 수준이었다. 모닝똥만큼 중요하게 일본어 강의로 하루를 시작했다. 주로 혼자 지내던 적막한 집안에 일본어 쌤과 나의 대화가 경쾌하게 오고 갔다. 녹화된 온라인 강의 화면을 멈추고 억울한 듯 “아, 쌤 저 아직 못 썼는데!” 이런 말을 해가며. 어느 날은 종일 내가 말한 상대는 일본어 쌤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바로 일본 유학생이지 싶었다. 남편은 집에 들어올 때마다 내가 일본어 공부 중인 게 가끔 무섭다고 했다.




여전히 일본어 되게 못하는데 유료 강의는 끝이 났다. 대신 친절하고 유능하신 유튜버들이 올리는 ‘애니로, 드라마로 배우는 일본어 강의 골라 보느라 너무 바쁜 거다. 하루  , 일본어를 10분이라도 스치지 않으면 아쉽다. 자기 전에 누워 오늘 외운 일본어 표현을 떠올려보고 생각나면 물개박수, 생각나지 않으면 일단 자고, 내일 아침  뜨자마자 확인하기로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버스 타고 운동가는 동안 간판에 적힌 숫자를 일본어로 말한다. 오늘은 일본 만화 원서를 덜컥 구매해 배송을 기다리고 있다. 일본어 필사도 해볼까 싶어서. SNS 해시태그 기능을 사용해 책과 커피, 일본어로는 ‘혼本ほん ‘코히コーヒー 추가하고 결이 맞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한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배워야   무지 많다. 하루가 24시간인  아쉬워 내일에게 1시간만 빌리고 싶다.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내일을 막고 싶던 내가 제발 내일  달라고  내미는 격이라니.




지금보다 더 아플 때, 나는 아픈 줄도 모르고 진취적이었다. 우선 보약을 한 채 지어 먹었다. 그리고 열심히, 다양한 병원에 다니며 몸에 좋다는 건 다 찾아 먹었다. 그런데 꽤 오래 괜찮지 않았다. 몸과 마음 모두 고장 났는데 마음은 경히 여겼다. 아마 그때 찾아 먹은 음식의 효과라고는 하루 버티는 열량 정도였을 거다. 반면 마음을 살피기 위해 시작한 생활 습관은 하루 이상의 효과를 보인다. 열량뿐 아니라 마음 구석구석에 균형 잡힌 영양소와 훌륭한 맛이 전달되는 것 같다. 혹 다시 급격히 우울해진다면 약의 증량보다는 예쁜 일본 그림책 처방이 낫지 않을까. 책 하나 내 앞에 툭 던져주면 눈이 반짝반짝할 거 같다. 그 어느 때보다 보약 같은 일본어, 오늘도 챙겨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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