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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Mar 03. 2022

필사를 시작했습니. 다만

 





명랑한 글을 쓰고 싶다. 키득키득 거리고 줄을 치는 와중에도 어깨가 들썩이는 그런 글. 그런 글이 좋으면서 정작 나는 봉천동 신파극만 쓰는 것 같아 살짝 움츠린 상태다. 그럼에도 계속 쓰는 이유는, 글을 쓰며 나와 세상의 중심에 뭐가 있는지 발견하는 일은 즐거우니까. 알쏭달쏭한 무엇이 글을 적다 보면 곧 정체를 드러내는 기분이니까. 나처럼 제 때 말하지 못하거나, 타이밍을 자주 놓치는 사람들은 더욱 글이 절실하다. 말하지 않는 너머의 문제가 고민되는, 찝찝함이 자꾸 감지되는 사람은 글을 안 쓸 수가 없다. 글쓰기를 향한 짝사랑은 이처럼 갸륵하고, 글공부하는 학생 신분을 누리던 문창과 시절은 지금의 나와 너무 거리가 멀고.




글쓰기 수업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몸과 마음이 자꾸 하강하는 내 문제들을 잠시 뒤로하고, 글 속에 소중한 ‘내 아’를 잉태해 서사를 담고 싶은 고이 접은 꿈을 다시 폈다. 그리고 재활 운동 등록만 1년째 고민한 것처럼, 한동안 신문사 문화센터 홈페이지를 배회했다. 1일 최소 3회 이상은 접속한 것 같다. 그런데 현실은 강의 날짜가 맞으면 주머니 사정을 운운했다. 그만큼 간절하지 않은 건가.




그러던 중 집 근처 책방에서 한 달, 매일, 필사 모임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나귀 필사 클럽>. 그린 라이트다. 책 속 문장을 직접 적다 보면, 잘 쓴 문장을 먹을 수 있고, 다독할 수 있지 않을까. 냅다 가입했다. 가입비는 만 원. 이건 정말이지, 글쓰기 수업 대신 좋은 장치라고 확신했다. 한 가지 중요한 건 나로서는 새 계정을 파는 거였다. 아프면서 주변의 도움과 관심도 많이 받았지만, 나에 대한 편견도 쌓인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책을 읽는지까지 특별히 가족과 친척들에게는 읽히고 싶진 않았다.




모임 시작 전에 필사하고 싶은 책들을 책장에서 빼놓았다. 어떤 참여자는 우리가 아는 그 토지 한 권을 필사하는 경우도 있었고, 메리 올리버의 시를 적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부분 한두 권을 정했는데, 나만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책을 자꾸 추가했다. 책방 사장님이 그래도 된다 해주셔서 고마웠다. 멤버들 덕분에 평소 궁금하던, 살지 말지 고민하던 책을 미리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게시물에 댓글을 달며 책 속 문장을 가슴에 새기는 이 귀중한 행위를 응원했다. 




누군지 절대 모를 사람들과 이렇게 매일 서로의 내면을 쓰담쓰담한다는 게 신기했다. 책을 고르고, 문장을 고르고, 노트에 쓰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과 감정에 늘 촉을 세워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세상에, 하고 많은 일 중에, 우리는 왜 함께 필사를 하고 있는지. '다들 대단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하면서도 뿌듯했다. SNS의 순기능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며 이 분위기에 푹 빠졌다.







근데 빠져드니 좀 아팠다. 목 디스크 때문에 목이 아프고, 어깨가 자주 뭉치기도 했다. 내 미미한 몸은 설거지 전후로 스트레칭을 해야 하듯이 필사할 때도 그래야 했다. 글 쓰는 자세를 촬영해보고 몸에 무리가 가고 있진 않은지 체크했다. ‘글쓰기 바른 자세’라고 검색해가며 최적의 자리와 자세를 잡았다. 이 정도로 해도 몸은 늘 쑤시고 아팠다. 그러나 어쩌나. 이 필사 모임이 귀한걸. 그동안 책을 기록하지 않아 그때의 기분과 생각은 금세 휘발되곤 했는데, 직접 쓰니 얼마나 좋은가. 좋은 문장이 모두 내 가슴에 켜켜이 쌓이는 것 같았다.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 않아도 기분이 하강하지 않는 비결인 것 같았다. 마음에 어지간하면 깨지지 않는 보물함이 생긴 기분이랄까.




여느 때처럼 필사 멤버들의 댓글을 기대하며 SNS를 켰다. 그런데 '로그아웃 되었습니다' 알람이 떴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난 아무것도 누르지 않았는걸.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다시 입력했다. 무슨 자신감인지 번호가 틀렸다는데 같은 걸 세네 번 연거푸 입력했다. 결국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 비밀번호 목록을 확인했다. 역시나 틀렸단다. 그렇게 5분 정도 지났을까. 내 프로필 사진과 문구가 바뀌었다. '꿀부업 재택근무 수익보장 모집 중.’




팔로워는 단 12명. 필사 모임 멤버다. 시작한 지 이제 막 2주 되었으니까, 게시물도 12개. 필사만을 위해 살며시 연 부계정이 도난당할 줄이야. 꿀필사 계정이 꿀부업으로 바뀌는 데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하며 당장 꿀부업 본 계정에 메시지를 날리고 싶었지만, 작정하고 해킹하고 비밀번호를 바꾼 검은 아우라에 일개 필사녀가 덤벼 뭘 얻을 수 있을까. 




빼앗긴 계정을 보는 건 정신건강에 해로웠다. 큰맘 먹고 시작한 필사 중에 이런 사건은 마치 기승전결에서 '전'쯤에 해당하는 클라이막스일까.  '꿀필사 전문, 재택 가능, 노트 필수'라 적고 다시 시작하면 속시원한 결말이 기다리려나. 쪼그라든 마음으로 갑자기 성경도 읽고, 마녀체력 작가의 '걷기의 말들'도 읽었다. 작가가 언급한 박은지 작가의 말이 와 닿았다.




도망이라니, 어쩐지 소극적인 태도 같아서 찝찝하긴 하다. 무서워도 맞서는 게 맞나? 합기도를 포함해 각종 격투기를 배우고 있는 박지은 작가는 <여자는 체력>에서 말했다. 대부분의 공격 상황에서 '즉각적 후퇴'는 부상이나 피해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다만 상대가 얕보지 못하도록 평소에도 단호한 눈빛, 당당한 걸음걸이를 훈련하라고 권한다. 141p. '걷기의 말들'(마녀체력, 유유출판사) 에서.





지금 내게는 매서운 눈빛이 없다. 그냥 필사 계정에선 도망쳐! 대신 본 계정에서 단호하고 당당하게 '필밍아웃' 해야겠다. 엄마 아빠, 동생아, 외숙모, 친척오빠 언니들! 이뿐 아니라 전 직장 동료와 선배, 본부장님, 우리 교회 소중한 성도들이여. 저 요즘 필사해요. 얘가 왜 이렇게 갑자기 말이 많은가 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필사 모임은 소중하니까요.




필사 계정의 빼앗긴 문장들은 마음속 보물함에 보관했다. 그 문장들은 여전히 내 노트 안에 있다. 온라인 범죄가 비일비재한 중에도 책꽂이에 꽂힌 필사 노트까지 빼앗기진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몸을 다독이고 마음을 위로하며 ‘꿀’필사해야겠다. 매일 쓰다 보니 어깨와 목이 아팠으므로, 책방 사장님께 양해를 구해 이삼일에 한 번씩 올려야지. 꿀필사는 나의 본 계정에서, 아 윌 비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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